동남아A/캄보디아

앙코르왓 관련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태초 여행사 2009. 11. 14. 22:54

 

 

캄보디아의 앙코르 왓!!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 위대한 건축물에 대하여 밝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앙코르 왓처럼 잘못 알려진 유적도 드물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1.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2. 서양사람들의 시각으로 파헤친 결과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앙코르 왓의 잘못 알려진 사실을 재 조명해 보자.

  

[1] 방문자는 있었어도 발견한 사람이 없는 앙코르 왓

 

1.     앙코르 왓 발견이라는 말의 허구

대부분의 앙코르 왓을 소개하는 책을 보면(영문판이든 일어 혹은 한글판이든) 서기 1859년 열대 밀림을 탐험하던 용감한 학자 '앙리무어'1,000년간 정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원을 발견하였다 라고 써 있다.

확실한 것은 앙리무어가 시엠리업의 정글 속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모든 책에서 금과 옥조처럼 받드는 이 앙리무어는 '발견'이라는 단어를 한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앙코르 왓을 탐사하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조사를 하던 간에 들어와서 보는 사람들이 조금만 성의를 가지고 연구를 하였다면, 엉터리 없는 결과는 피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길이 있다.

앙코르 왓의 정면은 서쪽을 향해 있다.

서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돌아본 뒤 나갈 때 동쪽으로 가면, 앙코르 왓의 건물 소재와는 전혀 다른 홍토석(라테라이트 라고도 한다.)으로 쌓은 탑을 하나 볼 수 있다.

이 탑은 1층 회랑의 외부에 있으며, 탑 위치의 1층 회랑에는 돌 벽에 써놓은 글이 있다.

바로 이 글만 읽어보면 앙코르 왓이 정글 속에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문제는 크메르 어로 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성의를 보인다면, 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문이 많이 있으며, 서기 1702년에 이 지역의 호족 장이던 사람이 아내와 아들이 먼저 죽자 앙코르 왓 안에 묘를 만들어 탑을 쌓았고, 그 탑이 위치한 1층 회랑 안에 이 문제의 글을 남겨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내용에 대한 연구는 차지하고라도 한 두 가지 문제는 짚고 가야 한다.

먼저 서기 1702년에 이 지역을 관장하는 호족 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앙코르 시대 이전부터 부족 별로 뭉쳐 살아 오기도 했지만, 호족 장이라는 지위를 현대의 군수 정도로 해석하는 데일단 호족 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있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고 가자.

즉 이 근방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에 의하면(비록 책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정글 운운 하지만......) 1431년 시암 족의 아유타 국이 침략하여 나라가 멸망 한 뒤 지금의 프놈펜으로 옮겨서 유민들을 수습한 포니얏 왕이 3년 만에 태국의 왕자였던 총독을 죽이고 앙코르 왓을 수복한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방 3km에 이르는 정사각형의 대 도시, 최고 100만 명까지 추정되는 인구가 살던 대 규모 계획도시 앙콜톰이 심하게 훼손되어 도저히 도읍지로 다시 쓸 수 없게 된 것, 시암 족의 재침 등으로 인하여 수도를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앙코르 왓을 소개하는 책들은 이 시점부터, 혹은 1431년부터 수수께끼로 가득한 앙코르 왓은 정글 속에 묻힌 것으로 쓰고 있다.

1431년부터 1702년까지는 겨우 271년이다.

이걸 어떻게 해서 1,000년 세월로 늘릴 수 있을까?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다.

1540년 앙칸 왕이 수도를 다시 앙코르 지역으로 옮긴 것이다.

이름이 무척이나 긴 앙칸 왕의 아들인 다음 왕 대까지 앙코르 지역을 수도로 삼은 제국은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미완성의 사원이던 앙코르 왓의 공사를 마무리 한 것이다.

  앙코르 왓의 백미로 일컫는 1층 회랑의 부조.

이 부조를 서쪽 면부터 관람을 시작하여 남쪽, 동쪽으로 가면 동쪽의 절반(남측) 새겨진 극락과 지옥도의 모습이 있고, 다시 동쪽의 북측으로 넘어가면서 회랑 바깥에 위에 언급한 탑을 보고 건너가면, 지금까지의 조각과는 전혀 다른 아주 조악한 부조가 북쪽 회랑 전체까지 이어진다.

서기 1113년에 정권을 잡은 수리야 바르만 2세가 1150년 안남지역(지금의 베트남 남부)의 반란을 정벌하기 위해 출전하고, 전사하면서 30여 년 동안 건축해온 앙코르 왓의 공사가 중단 된다.

   현재 1층 회랑의 조악한 조각이 완성되지 못하고 공사는 중단 된 것이다.

이 부분의 조각은 당시에 앙코르 왓을 차지하고 수행정진을 하던 시암의 승려들을 내쫓고 앙코르에 입성한 앙칸 왕과 그의 아들에 의해 완성되는데, 결국 앙코르 왓을 완공한 날은 수리야 바르만이 전사한 서기 1150년이 아니라, 1540년부터 시작되어 160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이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 와중에 앙코르 왓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1579년 기둥에 쓴 글)

왕은 도성을 에워싼 성벽의 돌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보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9개의 첨탑을 가진 지붕을 재 축조하였다.’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에 앙코르 지역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다시 계산을 해보자.

제국의 멸망은 1431, 앙칸 왕이 다시 수도를 앙코르 지역으로 옮긴 것이 1540, 그 기간은 109년으로 또 단축된다.

100 여 년 사이의 간격을 1,000년 세월로 둔갑시킨 것이다.

물론 17세기 초에 앙코르 왓의 진정한 완공을 이룬 이후 왕도가 계속 거기에 있지는 않았다.

태국의 섭정을 받고 있던 제국의 왕실에서는 독립을 이루기 위해 지금의 호치민을 베트남의 왕에게 지참금으로 떼어 주면서까지 베트남의 공주와 결혼을 하여 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을 했다.

왕도 역시 남쪽으로 이주하여 깜퐁 르응, 깜퐁 수응 등을 거쳐 지금의 프놈펜에서 약 40km 북쪽에 위치한 오동까지 내려왔다.

그러면 또 다시 앙코르 지역을 비워둔 세월이 나온다.

하지만 사람이 분명히 살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나라에 귀빈이 들어오면, 혹은 외국의 사신들이 들어오면 국왕이 앙코르 지역으로 여행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더구나 사신들에게 기념이 될만한 조각을 가져가도록 허락을 했다고까지 하는데, 국왕은 이 사신들의 일행을 위해 현지의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관료는 어디에 살았을까?

그 호족 장도 그런 관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 관료들은 당시 이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시암의 허락을 받아 앙코르 지역으로 들어갔으며, 태국 왕실에서는 해마다 공주를 앙코르 왓으로 보내어 참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 증거가 있다.

17세기 초 포르투갈령 동남아 식민지의 공식 편집관 디오고 도 코우토는 한가지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1586년부터1588년 경에 앙코르를 방문했던 수도사의 기록인데, 1614에 발간된 책자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이 여행담이 우여곡절 끝에 누락되고, 1954년에서야 발견이 된다.     

 

2.     앙리무어 방문 이후 앙코르 지역의 운명

이런 저런 기록 등을 뒤져보면 앙코르 지역은 사람이 분명히 살고 있었고, 1800년대 초 중국인 주달관이 앙코르 제국의 왕성을 직접 방문한 뒤 돌아가서 쓴 진납풍토기 라는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이 될 때만 해도, 미개한 아시아의 원주민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대 도시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불신이 더 컸었다.

그러던 중 1858년에 발간된 부유보 라는 신부의 앙코르 왓에 대한 여행기에는 마치 신비의 세계를 묘사하듯 하였다. 천지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 있고, 그 위치는 바탐방(캄보디아 제 2의 도시로 태국과 가까우며 앙코르 지역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다.)에서 이틀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는 등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를 읽었던 앙리무어가 시암(태국)으로 들어와 곤충과 새 등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똔레삽 호수(아시아 최대의 호수로 캄보디아 중앙에 있음) 주변에 신비한 새가 산다는 것을 듣고는 앙코르 지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 왓을 방문하게 된다.

그는 이 놀라운 사원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구조, 크기 등을 기록하고 영국의 신문에 원고를 보냈고, 이 짤막한 여행기와 1861년 라오스 정글에서 쓸쓸히 죽은 앙리무어의 일기가 동생에 의해 출간되면서 탐험가들의 의욕을 부추겼고, 동아시아의 탐험 붐에 불을 당기게 되자, 부유보는 급기야 자신의 글을 수정하여 1874년에 증보판을 내 놓으면서 많은 부분을 앙리무어의 일기 내용과 일치시킨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숨어있다.

진납풍토기를 읽어본 서양사람들의 반응과 앙코르 왓을 직접 들어가 본 앙리무어의 사고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리무어의 일기 중에

‘-중략- 코친 차이나 에는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투입하여 지은 구조물의 잔해가 있다. 그 구조물을 처음 보는 순간 누구나 존경심을 품게 된다. 이처럼 강성한 민족, 문명이 발달한 개화된 민족, 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민족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앙코르 사원 중의 하나 솔로몬의 성전이나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에 필적하는 는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 갖다 놓아도 당당히 한 자리를 할 것이다. 이 사원은 그리스나 로마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장엄하다. 그런데 이런 문명을 개화시켰던 나라가 지금은 야만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비애감마저 느껴진다.’

이 글에서 보면 그가 방문한 당시의 캄보디아는 야만인들의 세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또,

원주민 들 사이에 신(천사라고 기록함)이 지었다.’

안내자는 그곳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등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하였으며, 낭만적인 그의 일기는 앙코르 왓의 신화와 겹치면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스스로 발견자 라고 자칭하던 부유보에 비해 더 정확한 탐험 기록을 남겼으며, 자신이 발견했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무어의 앙코르 왓 발견은 마치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는 당시로서는 정말 어려운 탐험을 해 낸 위대한 과학자(박물학) 앙리무어에 대한 모독이며, 그의 방문 이후 본격화 된 캄보디아의 식민 통치를 위한 프랑스 해군의 정밀 탐사(1862)와 유적의 청소와 복원, 보존을 위해 일어난 훼손을 합리화 시키는 비 문명적인 행위와 다름이 없는 야비한 야만적 행위 일 뿐이다.

건기 동안 나무 제거작업을 하고, 다시 우기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동안 또 다른 나무가 우묵 장성하여 유적을 가려버리는 일이 연속되고, 무너지는 회랑을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로 떡 칠을 하였으며, 바푸온 사원의 대형 와불을 훼손하고, 프놈바켕 사원 앞에 있는 대불 아예 철거를 해버리기도 했으며, 아무 대책도 없이 원주민들(캄보디아 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물의 사이를 뚫고 나와 자라난 거대한 스펑 나무를 베어 버려 오히려 성벽과 유물이 무너지게 하는 등의 실수는 가히 만행이라고 할 만하다.

1908년에 샤를 카르포가 쓴 앙코르 지역의 유물 복원 작업의 기록에 보면, 지금의 쫄츠남(캄보디아 신년 축제, 보통 412~15일 사이)에 앙코르 지역의 주민들이 동물의 탈을 쓰고 춤을 추며 노는 것을 묘사하고, 승려들에게 앙코르 왓 안에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 등을 하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지극히 교만한 서양인의 우월감 말고는 얻을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앙코르 지역의 유물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식민 통치를 항구적으로 영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부였을 뿐이며, 진정으로 캄보디아를 위해서 한 것은 아니다.

 

이들에 의해 앙코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신화는 쓰여지게 되었고, 앙코르 지역은 옛 모습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2007년 캄보디아와 베트남 남부, 라오스, 태국 지역의 나무를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제국이 멸망하던 1431년경 동남아시아에는 5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동안 지독한 가뭄에 시달렸으며, 인구가 100만에 이르던 앙코르 제국의 수도 앙콜 톰 성내에 완벽하게 설치되어 성내 어디에라도 쉽게 도달 할 수 있게 만든 수로(운하)는 물이 말라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제국 멸망에 대한 유추 연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앙코르 왓은 앙리무어에 의해 발견된 마지막 불가사의한 건물일 뿐이었다.

 

[2] 기타의 허구

 

1.     앙코르 왓 이라는 이름

역사 기록상 캄보디아 최초의 왕국은 이름이 노꼬 프놈이었다.

이를 중국에서는 프놈 이라는 단어의 음가만 써서 푸난(扶南), 혹은 후난이라고 하였다.

노꼬’, ‘노꼬로는 힌두 설화의 거대한 뱀 신 나가스의 크메르 어인데 이 노꼬로를 프랑스 어로 옹꼬로(Ngkor)라고 하였고, 이를 영어로 표기 하여 앙코르(Angkor)가 된 것이다.

또한 은 태국어이며,, 사원이라는 뜻인데, 원래 크메르 어로 말하면 쁘레이 비히어가 된다.

따라서 앙코르 왓을 크메르 어로 말한다면, ‘쁘레이 비히어 노꼬로가 된다.

 

2.     도서관의 진실

앙코르 왓의 정면인 서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 입구 탑에 들어서면 장장 500여 미터에 이르는 긴 돌다리가 통로처럼 늘어져 있다. 이 도로의 양편으로 앙코르 중앙 탑에 이르기 전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도서관이라고 한다.

앙코르 왓을 안내하는 모든 책에는 반드시 도서관, 라이브러리, 경장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프랑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하여 앙코르 왓을 조사한 조르주 세데스에 의해 쓰여진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인데, 이후에는 아예 도서관’, 혹은 책이 발견되었다.’ 는 등으로 정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캄보디아의 책력은 원래 태음력이었고, 지금도 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음력의 산법은 초하루, 초이틀~ 열 나흘, 보름까지는 똑 같지만, 보름의 다음날은 16일이 아니라 다시 초하루가 된다. 앞의 보름 동안은 뜨는 초하루, 뜨는 초이틀~ 뜨는 보름 하다가, 뒤의 보름 동안은 지는 초하루, 지는 초이틀~ 지는 보름으로 끝이 난다. 

앙코르 왓의 첨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반으로 나누어보면, 1층 회랑의 부조 내용이 오른쪽은 고대 힌두의 조상들에 대한 내용이며, 왼쪽은 힌두 설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어느 쪽을 뜨는 달이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제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건물은 하나는 뜨는 달’, 다른 하나는 지는 달 이라는 것까지만 알려져(캄보디아의 기록에 의하면) 있다.

용도는 도서관처럼 책을 보관하던 장소가 아니라, 예를 들어 오른 쪽의 건물이 뜨는 달이라 할 경우, 매달 첫 보름(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즉 뜨는 달 기간 중에는 이 건물을 관장하는 브라만 사제가 앙코르 왓 안으로 들어가 조상을 위한 회향을 하고, 다시 후반부의 보름기간(16일부터 그믐날까지)에는 왼쪽의 건물, 즉 지는 달의 수행자 들이 앙코르 왓 안으로 들어가 신을 위한 제사를 올린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제실 이라고나 할까?

이와 같은 왜곡은 우리나라에도 많지 않은가 말이다......

 

3.     왕의 무덤으로 지어진 건물

앙코르 왓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지만 1296년에 이곳을 방문한 이방인(중국인)에 의해 남겨진 기록이 있다. 진납풍토기 라는 책인데, 이 책에는 앙코르 왓을 뤼판의 묘라고 써 있다.

뤼판은 전설 속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건설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앙코르 왓은 바로 뤼판처럼 하늘에 사는 신선()이 만든 건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왕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왕의 무덤으로 쓴 것은 사실이다.

중앙 탑 지하의 성소에 왕의 시신을 화장한 유골을 보관한 성소가 있었으며, 유일하게 이 건물을 지은 수리야 바르만 2세 한 왕만 이곳에 모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앙코르 왓 기둥 곳곳에 있는 기록을 보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신비에 쌓인 앙코르 왓의 수수께끼가 하나하나 풀리면서 이 건물은 왕의 무덤이라는 기능도 하였지만, 보다 중요한 용도는 인간이었던 왕자가 대관식을 치르고 왕이 된 후 우주를 통치하는 바르만(신의 보호를 받는 위대한 통치자)라는 것, 신왕(데바라자: 살아 있는 신) 이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요한 힌두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사실이다.

앙코르 왓 이전에도 이런 건물이 필요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바콩 사원이며, 바푸온 사원이고, 쁘렐룹 사원이다. 멀쩡한 인간이 들어갔다가 나오면 신이 되는 장치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앙코르 왓이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 의해, 일제에 의해, 미 군정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완전히 다르게 기록되었고, 잘못 알려져 왜곡 된 것이 많다.

물론 우리 민족 스스로도 그렇게 한 적이 많다.

유명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위해 이전의 기록을 모두 불태운 적도 있었고, 우리 스스로 식민 사관에 사로잡혀 우리 민족은 나약하고 작은 나라이며, 열등한 민족이라 생각하면서 살기도 하였다.

 

한 민족의 부침과 역사의 흐름은 비극을 만들기도 하고, 자부심도 만들어 주지만, 나약했던 아시아 제국이 위대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문명에 눌려 지내는 수백 년 동안 야만’, ‘미개 라는 많은 수식어를 달고 살았으며, 우리 스스로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면서 살아왔듯이 가난한 캄보디아는 앙코르 왓을 건설한 조상을 두고도 자신들은 외부에서 새로 유입된 진정한 후손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야만족’, ‘미개인의 표상이 되었다.

같은 아시아 권의 한국인들은 캄보디아에 여행을 와서 가난한 아이들을 보고, 삶에 지친 캄보디아인 들을 보고는 미개인 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분명 앙코르 왓을 건설한 제국의 후손들이며, 위대한 문명을 꽃피운 대 제국의 후예들이다.

다만 가난할 뿐이다.

잘못 알려진 앙코르 왓, 잘못 알고 있는 캄보디아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서양의 역사만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우리와 한 뿌리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아니 분명 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아시아 문명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부활시키는 길이 아닌가 한다.

 

 

 

출처- 인터넷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