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현상과 이해

기호학

태초 여행사 2010. 10. 12. 14:21

제 1장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기호들은 인간의 삶과 깊숙이 얽혀 있기 때문에, 기호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을 이룬다. 철학과 심리학과 기호학은 3대 기본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이 인간의 사상을 탐구하고, 심리학이 인간의 정신구조를 탐구하는 기본 학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호학은 인간이 다루는 모든 상징체의 구조와 그것이 체현하는 사상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귀로드Guiralud(1975)는 기호학을 기호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라고 간단히 정의했지만, 이 정의는 좀더 자세한 사항들을 가지고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체험적 시간과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심리학의 바탕 위에 서서 철학의 하늘 아래 산다. 바꿔말하면 인생은 철학과 심리학 사이에 펼쳐저 있는 공간이다. 철학과 심리학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 상징체들이고, 그러한 상징체의 기본이 기호이다. 인간이 창조적 동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기호들을 엮어, 의미 있는 상징체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존재임을 가리킨다.



기호학은 상징체의 창조와 의미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상징체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으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기호학이다. 기호들은 우리의 일상성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당연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것이 숨어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의 의미가 바뀌면,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바뀐다. 인간과 세계는처음부터 끝까지 기호로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스위스의 기호학자 소쉬르Saussure는 기호학을 ‘사회안에서 일어나는 기호들의 삶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 했다(saussure, 1966). 그런데 기호들의 삶과 인간들의 삶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더욱이 기호들이 겪는 역사와 인간들이 엮어내는 역사들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것이 기호학적 요소를 그 근본에 지니고 있음에도 기호학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기호학은 모든 학문에 편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에고Eco나 프랑스의 보드리야르Baudrillard는 ‘기호학은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호학의 요소들은 문학, 예술, 건축, 과학, 공학, 군사학, 정치학, 의학, 동물학, 사회학, 광고학, 천문학, 심리학, 인류학, 법학, 종교학, 철학 등 모든 학문에서 발견된다.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군사학에서
쓰이는 암호와 수기신호는 인조기호들이다. 


병의 증상과 증후군은 의학을 성립시키는 기본 기호들이다. 벤젠의 화학 기호는 어느 화학자의 꿈속에 뱀 한 마리가 자기의 고리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신비롭게 예시되었던 기호이고, DNA 의 분자모형은 생명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기호이다. TV에서 날마다
보는 수백 수천의 광고들은 모두 상업 기호들이다. 심리학이나 법학 등에서 사용하는 분류법은 기호학적 조작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의하여 분류해 내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과 생사가 좌우된다.



현대 기호학은 일반적으로 문화현상과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문화현상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현상, 가령 정치, 경제, 종교, 사회현상 등에도 주목한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기호학은 기호에 의해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에코(1976)에 의하면, 기호학이란 모든 문화의 과정을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문화는 전적으로 기호학적 입장에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입장에서 문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작용력social forces으로서의 기호를 연구하는 것이 기호학의 주제라고 에코는 말한다(1976). 기호는 사회적 작용력의 체현일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일으키는 주체가 된다.



이 책은 기호학의 기본개념과 원리 및 응용에 관한 책이다. 피스키Fiske와 하틀레이Hartley는 기호학이 두 가지의 중심명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기호와 그것의 의미의 관계를 밝히는 것인데, 기호에 의미가 부여되는 작용을 의미작용 또는 의미화signification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기호가 코드에 결합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다(Fiske & Hartley, 1978). 이들이 말하는 첫번째 명제를 좀더 세분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명제를 얻어낼 수 있다. 그것은 기호작용semiosis이다. 의미작용은 기호와 의미가 갖는 구조적인 관계에 대한 것임에 비해, 기호작용은 기호와 의미가 어떤 구조를 갖춘 다음 기호로 하여금 일으키게 하는 심리공정에 대한 것이다. 이 세번째의 명제는 이데올로기와 관련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많은 논의가 될 것이다.



기호학에서는, 기호의 조직원리를 코드code라고 부르고, 코드에 의해 생산된 산물을 일반적인 말로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이 책은 텍스트를 이루는 온갖 이미지image, 은유metaphor, 환유metonym, 이야기체narrative, 신화myth, 이데올로기ideology 등의 상징체계들을 다루려고 한다. 이런 상징체계들은 신문, TV, 영화, 만화, 연속극, 광고, 잡지 등과 문학과 예술작품 같은 다양한 텍스트들 속에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우리가 날마다 대하는 것들이다.



이 책의 제목 ‘기호의 우리, 우리의 기호’가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기호의 제작자이고,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호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간은 기호에 의해서 외부의 세계를 이해하며, 이해한
것 만큼을 기호의 世界像으로 환치해 놓고 그 안에 안주한다. 그래서 기호는 우리의 것임에 동시에 우리들은 기호의 우리the cage of signs 속에 산다.







제 2 장



기호의 구조



이 장에서는 기호의 정의와 기호의 몇 가지 대표적 모형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기호의 종류와 성격, 기능에 대해서도 다루려고 한다. 먼저 소쉬르가 제시했고, 바르트R. Barthes가 정교화한 기호의 모형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기호는 세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기표, 기의, 그리고 기호 자체이다(Barthes, 1972). 이 중 세번째 요소, 즉 기호 자체는 기표와 기의가 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요소이다. 기호의 삼부모형은 기호를 나르는 운반체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즉 그것이 언어이든, 몸짓이든, 도상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틀을 유지한다.



기호학의 원칙은 사회현상을 기호로 대치substitution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작용은 의미작용이라는 수속을 필요로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기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기호=기표+기의



가령 발렌타인데이날 꽃님양이 돌쇠군에게 꽃을 바치는 일을 생각해보자. 꽃님은 돌쇠에게 사랑을 표시하기 위해서 하나의 기호를 만들어야 한다. 발렌타인의 날에 여성 쪽에서 흔히 사용하는 기호는 장미꽃이다. 그렇다고 장미꽃을 불쑥 내놓는다고 해서 기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한 가지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추상적 관념인데, 이것을 기의signified라고 부른다. 기의는 꽃님이의 머릿속에, 또는 가슴속에 들어 있는 정신적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의미의 운반체가 필요하다. 의미의 운반체를 기표signifier라고 부른다. 꽃님이가 돌쇠에게 장미꽃을 선물했을 때 장미꽃은 사랑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배어있는 특수한 장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표로서의 장미꽃이 사랑이라는 기의와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기호sign가 된 것이다.





의미작용



이처럼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을 의미작용 또는 의미화라고 부른다. 의미작용은 기호를 만들어낼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기호의 의미를 풀이할 때에도 일어난다. 가령 돌쇠가 장미꽃을 받았을 때, 그는 장미꽃(기표)에 어떤 의미(기의)가 결합되어 있나를 알아내야 한다. 돌쇠가 장미를 받고, ‘꽃님이 날 좋아하는 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으면 의미작용은 돌쇠 쪽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의미작용은 두 가지 방향으로, 즉 기호를 만들(기호작용)때와 기호를 풀이할(기호해석) 때 일어난다.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호(장미꽃)를 매개로 한 의미작용을 통해, 꽃님과 돌쇠 사이에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이다. 꽃님이 장미를 사랑의 기호로 만들 때의 의미작용과 돌쇠가 장미를 꽃님의 사랑이 담긴 기호로 받아들일 때의 의미작용이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을 때, 꽃님과 돌쇠 사이에는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의미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서로 다른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기표를 전달하는 과정인데 이럴 때의 기표는 흔히 메시지message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의 전달과정으로서, 같은 의미작용이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일어날 것을 미리 기대하고 쌍방이 참여하는 행위다. 우리말로 커뮤니케이션을 의사소통이라고 번역하느 ㄴ예가 많은데, 커뮤니케이션이란 소통의 개념과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의사를 기의나 또는 의미라는 뜻으로 쓰고 의사소통이란 말을 만들었다면 원리상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의사는 소통 될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알려면 커뮤니케이션과 대조되는 의미작용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의미작용은 기표에 기의를 더하거나 빼내는 작용이다. 특히 메시지의 수신자 쪽에서 보면 의미를 재생산해내는 작용이다. 의미는 전달될 수 없다. 그래서 송신자 쪽에서 일어난 의미작용은 수신자 쪽에서 일어날 의미작용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양쪽의 의미 창출과정은 서로 독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하는 것은 전달된 기표뿐이고, 전달된 기표는 수신자에게 의미를 재생산할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가령
독자 앞에 15게시의 희귀 고문서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그 고문서의 저자로부터 500년을 건너뛰어 독자에게 전달된 어떤 의미를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씌어진 이후 500년을 한결같이 어떤 독자에게든 의미 창출의 기회를 주어온 초대장이다. 저자의 두뇌 속에 있었던 의미는 독자의 두뇌에서, 운이 닿으면 재생산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무의미한 낡은 종이뭉치에 그치고 만다. 다행히 꽃님의 가슴속에서 일어난 의미작용이, 돌쇠가 장미꽃을 받은 후 일어났다면 꽃님과 돌쇠는 의미 (재)생산에 의해서 같은 의미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이다. 요컨데 의미는 전달이나 소통되는 것이 아니고, 의미 재생산에 의해서 공유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의사공유’ 또는 ‘의미공유’라는 말이 더 정확하며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기술하는 알맞은 용어가 된다.



종종 의미작용이 혼자만의 내적 과정으로 끝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의미작용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돌쇠는 꽃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나름대로 의미작용을 연출해 낸 것이다. 꽃님의 원의미는 재생산되지 못했지만, 돌쇠의 의미생산은 아둔한 대로 어쨌든 일어난 것이다. 꽃님은 돌쇠의 빗나간 메시지를 받고 새로운 의미작용이
머리 속에서 일어난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는 의미 재생산과 으사 공유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의미는 계속 빗나가며 생산된다.



소쉬르는 언어학자이기 때문에, 기표라고 말할 때 음성이미지를 가리키는 말로 썼으나 기표는 어떤 이미지라도 상관없다. 기표를 ‘기호의 이미지’라고 일반화해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표로 쓸 수 있는 이미지중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음성메시지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이미지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기호의 물질적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장미라고 소리내어 읽을 때 들리는 소리는 장미꽃의 음성이미지이다. 음성이미지는 귀로 들을 수 있다. 시각이미지는 대체로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장미꽃 자체로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또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장미’라고 쓴 글자로서 역시 눈으로 볼 수도 있고, 글귀가 트인 사람은 읽을 수도 있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강조해야 하겠다.



첫째, 기표를 듣고, 보고, 만지는 감각기관도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물질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둘째, 기표가 기의와 합쳐져서 기호가 된 후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압축된 기표(기호가 아님)가 되어 지각있는 동물의 두뇌에 도장이 찍히듯이 인각inscription된다. 두뇌에 인각된 기표는 두 가지 다른 물질계를 연결시킨다. 꽃님이 사들고 온 꽃, 아직 싱싱한 장미가 존재하는 세계, 바꿔 말하면 두뇌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세계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장미라는 장미의 이미지(장미 자체가 아닌)가 인각되는 두뇌 내부, 즉 젖은 뇌세포로된 물질세계다. 두뇌 밖의 세계를 의식 외부의 객관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내부에는 무의식의 어둡고 끝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요컨데 돌쇠의 두뇌에 인각되는 새로운 기표는 꽃님이 들고 왔던 장미꽃이 시든 후에도 시들지 않고 오랫동안 돌쇠의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된다.



기의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신적, 추상적 개념이다. 기의는 ‘어떤 것에 대하여 언급된 말’ 즉 기표에 대응하는 말이라고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Barthes,, 1967). 저게 뭐지? 라고 꽃님이 물었다고 하자, 이 질문에서 ‘저것’에 해당하는 물체는 기표이다. 돌쇠가 ‘그건 보름달이야’라고 대답했다면, 그 대답, ‘보름달’은 기의가 된다. ‘달에 대응하는 말’이 기의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표의 신세를 져야 한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의미작용이 일어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슴에 정신적 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기이이다. 기표의 이용이란 결국 정신세계라고 하는 보다 높은 세계, 즉 의미의 세계로 입장하기 위한 것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때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달을 보고나면 더 이상 필요치 않다(Capra, 1984). 기표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고, 달은 기의와 같은 것이다. 꽃님의 ‘사랑’이라는 기의가 장미꽃, 눈짓, 미소 등 어떤 기표를 이용해서라도 돌쇠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메아리를 치게 하고 나면 기표들은 시들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표는 기의보다 열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느 것이 우월한가에 대한 중요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자.





변증법적 합성



소쉬르의 기호모형은 이분법과 변증법적 합성이라는 대립되는 두 가지 조작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는 어떤 현실체를 볼 때,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이분법이 연속적으로 적용된다. 우선 나와 다른 것(나 아닌 것)으로, 다른 것의 모양과 그것의 배경으로, 그 다른것의 기호와 그 다른 것 자체로 갈라져 나간다. 이 연쇄고리의 마지막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 밖에 있는 다른 것(대상체referent)이 아니라, 그것을 대표(또는 표상)하고 있는 기호이다. 소쉬르는 이 기호를 한번 더 둘로 쪼갠다. 쪼개져 나온 것이 기표와 기의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이항대립쌍(이원항)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구조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서로 함께 있는, 그래서 그 구조 속에 공존하면서 서로 상쇄될 수 없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 binary opposite 또는 이원항이라고 부른다.







나self : 다른 것other



모양figure : 배경ground



기호sign : 대상체referent



기표signifier : 기의signified







마지막 대립쌍에서, 우리가 무엇을 지각할 때, 감관에 들어오는 것은 저 밖의 어떤 다른 것을 대표하고 있는 기표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조간신문이 문간에 던져지듯이, 우리의 감관 앞에 던져진다. 문간에서 쿵 소리가 난다. 그러면 우리는 ‘저게 무슨 소리지?’ 하고 자시네게 묻게 된다. 매일 조간신문이 날아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즉시 ‘아 신문왔구나’ 하고 기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집에 온 손님은 문간의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무슨 일이 이 손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가? 물론 의미작용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손님에게 일어나는 의미작용은 두 가지 고리를 따라 일어난다. 하나는 기표의 고리를 따라 일어나는 의미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기의의 고리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쿵’소리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즉 여러 가지 형태form를 손님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아래 그림에서 왼쪽에 나열된 것, 즉 기표의 의미작용이다. 동시에 또 한줄기의 의미작용이 손님의 마음속을 주욱 흐른다(그림의 오른쪽). 이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J. Lacan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Lacan, 1977)







기표의 의미작용 고리 기의의 의미작용 고리



새벽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오는 쿵 소리 도둑인가?



처마에 매달렸던 고드림이 떨어지는 쿵 소리 날이 풀리나?



신문이 떨어지는 쿵 소리 신문인가?



밖에 나갔던 주인 마나님이 발은 헛디딘 쿵 소리 넘어졌다?







<쿵> 소리가 손님에게 어떤 의미 있는 기호가 되기 위해서, 이 두
줄기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변증법적 합성이 일어나야 한다. 변증법이란 서로 상쇄시킬 수 없는 모순인자들을 합쳐서 원래 것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것으로 변환시키는 관념적 조작이다. 주인이 문을 열고 나가 신문을 집어들고 오는 것을 보는 순간, 손님의 마음속에서 기표와 기의의 변증법적 합성이 완성된다. ‘쿵’ 소리(기표)는 신문이 날아와 떨어지는 소리였음(기의)을 알게 된다. 일단 이 합성이 일어나면 ‘쿵’ 소리는 신문 소리의 기호가 된다. 소쉬르는 바로 기표와 기의의 총체를 기호라고 정의한 것이다. 따라서 소쉬르의 기호는 세 가지의 다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외부세계가 공급하는 기표, 둘째는 마음이라고 하는 내부세계가 공급하는 기의, 셋째는 이 두 가지가 합성되어 표상의 세계에 편입되는 기호다. 아래 그림은 이 세 가지 관계를 종합해서 나타낸 것이다.





표상세계





기호



외부세계 기표+기의 내부세계



전체적 의미작용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여기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내부세계에 축적되어 있는 기의이다. 어떤 기표가 주어질 때, 그것에 연결시킬 적당한 기의가 없으면 의미작용은일어나지 않는다



내부세계, 즉 마음은 문화적 체험의 창고라고 볼 수 있다. 걱에는 잡다한 관념, 이미지 등 지각요소의 계열체가 들어 있다. 이것은 모두 기의이기 때문에, 위으 그림에서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기의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을 이미지 저장소image-repertoire 라는 말로 표현한다.



라캉의 Sr/Sd 모형이 암시하는 것처럼, 인간은 기표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존재이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이와 같은 미끄럼을 타다가 소급하여 의미작용의 고리에 매듭을 매김질할 때이다. 즉 의미는 지나간 것을 되돌아보는 어느 구간에서 생겨난다. 의미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돌아보는 구간의 폭을 조정하는 것에 따라 거기에 잡히는 기표의 조합도 달질 것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도 다소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언제나 불안정하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안정된 것을 원한다.



결국 라캉이 보는 인간은 자아와 의미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움직임속에 사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신화학자인 캠벨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체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대 자신의 의미는 그대가 거기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Campbell, 1988). 그렇다. 자아가 <여기 있다는 것> - 그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인간이 바로 기호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 캠벨은 <자아가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희열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희열은 도대체 어떻게 느껴지는 것일까? 기호를 통하여 느껴진다. 희열의 느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인식이 느낌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느낌을 의미 있게 한다는 것은 결국 느낌의 해석이지 않은가? 결국 인생이 의미를 추구하든 안하든, 의미는 따라오게 마련이다. 방브니스트는 소쉬르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인간 자신이 하나의 기호이고, 그의 사상이 하나의 기호이며, 그의 하나 하나의 감정이 기호이다>(Benveniste, 1985). 이를 근거로 캠벨의 말을 다시 읽으면, 그는 사람이 자신 안에 체현하고 있는 의미를 생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거기에 단순한 기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기호>이다. 기호로서의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의미와 더불어 <거기 있는>존재이다.





기호, 거짓, 진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조합combination으로 만들어 진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기호는 몇 가지 중요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에코의 <거짓말 이론theory of the lie>을 먼저 음미해 보자.



기호학은 기호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다른 것을 의미 있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가 될 수 있다. 어떤 다른 것이란 기호가 그것을 표상하고 있는 시간에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실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된다. 그래서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거짓을 말하는 데 쓰일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도 쓰일 수가 없으며 말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짓말 이론>의 정의를 일반 기호론의 꽤 포괄적 프로그램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Eco, 1976)



이 인용에서 기호의 두 가지 특성, 즉 기호의 표상성과 진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러지는 중요한 철학적 명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기호의 표상성representativeness은 기호가 현실체reality를 어느 정도 인간의 인식에 반영해 주느냐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 기호의 대상성referentiality은 기호의 표상성을 다른 각도에서 하는 말인데, 현실체에 관한 존재론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기호의 진위성은 기호의 효용에 관한 윤리성, 정치-경제적 비판이론을 비롯한, 진리를 기호의 대상성의 맥락에서 보고 있는 진리론과 관련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호의 모형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퍼스의 삼부모형



첫째, 기호의 표상성(또는 대표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어떤 다른 것을 의미 있게 대신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기호의 표상성을 나타낸다. 한 기표가 다른 어떤 것을 표상함으로써 기호가 될 수 있다는 기호의 존재양식이 흥미롭다. 이러한 기호의 표상성을 잘 나타낸 것이 미국 기호학의 창시자인 퍼스Peirce(1931-1958)의 다음과 같은 모형이다.



그림에서 왼쪽 기호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 즉 물체를 대표한다. 예로 그림 오른쪽 꼭대기에 있는 하트기호©는 기호로서, 심장(염통)을 표상한다. 그림 왼쪽에 있는 해석체는 기호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정신적 개념이다. 이런 해석체는 물론 기호 사용자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떠오르기도 한다. 하트모양의 기호가 유발시키는 정신적 개념은 사랑이다.



영국의 수사학자 오그든C. K. Ogden과 리챠즈I. A. Richars(1989)의 용어를 써서 이를 다시 설명해 보자. 오그든과 리차즈는 물체를 대상체referent라는 말로, 해석체를 사상체reference라는 말로 표현한다. 만들어진 기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기호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어떤 것(물체 또는 대상체)을 은연중에 항상 지시한다. 그래서 대상체는 기호 주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좀더 나가면 기호는 실제 대상체를 잠적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호는 대상체를 시야 밖으로 사라지게 한다. 대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대상체가 기호 주변에 얼씬거리면 기호가 대표로서의 구실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 라캉의 말을 빌려 말하면 기호는 대상체를 <뒤로 밀어버리는defer> 역할을 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표상성에 대한 종합으로 방브니스트의 글을 인용하기로 한다. <기호의 역할은 대표하는 것, 즉 대치에 의해 다른 어떤 것을 언급하며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1985).>



둘째, 만들어진 기호는 대상체를 대표함과 동시에 어떤 정신적 개념을 띠게 된다. 이것은 위에 인용된 방브니스트의 말 중 <다른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사실은 기호의 대표성이란 해석체를 기호 사용자의 마음속에 유발시켜 주는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일부는 기호 사용자의 과거 경험을 빌리는 데서 얻어지기도 한다. 기호는 대상체를 사라지게 하는 대신, 해석체(또는 사상체)를 떠오르게 한다. 하트모양은 우리 마음에 사랑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하트모양의 기호가 만들어진 이상, 꽃님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피가 줄 줄 흐르는 진짜 심장을 꺼내 보여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퍼스의 모형은 실상 소쉬르의 모형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두 가지 모형은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을 뿐 형식상 같은 것이다. 퍼스모형의 물체(대상체)는 소쉬를 모형의 기표에 해당하고, 해석체(사상체)는 기의에 해당된다. 이 책에서는 주로 소쉬르의 모형에 나온 개념을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게 될 것이다.





표상성(대표성)



소쉬르의 모형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기호의 표상성을 따져보면 기호의 또 다른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꽃님이 만든 사랑의 기호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자. 꽃님은 장미꽃(기표)에 사랑(기의)을 합쳐 사랑의 기호를 만들었다. 독자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사랑을 표시하는데 왜 하필 장미꽃, 그것도 가시가 달리 꽃인가? 이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자의성arbitrariness을 지적하는 메우 중요한 질문이다. 더 나아가 기호가 품고 있는 의미체제 전반의 자의성을 들먹거려야 하는 극히 중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기호가 만들어질 때 기표와 기의는 기호 제작자 마음대로 연결된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기호를 이루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자연적 연결natural connection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쉬르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자연적 연결이 존재하는 기호도 있다고 반론을 펴는 기호학자들이 있다(Eco, 1976). 가령 꽃벌의 붕붕소리, 돼지의 꿀꿀소리 같은 의성어에서는 기표와 기의 간의 자연적 연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호들을 볼 때, 소쉬르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된다.





자의성



일반적으로 기의와 기표간에는 자의적 연결이 있을 뿐이다. 대상체를
표상할 때 기호가 드러내는 기의와 기표 간의 자의성은 기호생산에 무한한 융통성을 준다. 사회습속인 시대정황 같은 것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어찌되었건 대체로 기표와 기의는 자의로 연결된다. ㅇ러한 자의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뭇한 기호들을
생산할 수 있다.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성은 논리를 거부하고 학습을 요구한다. 언어는 배워야 할 따름이다. 물론 어원학etymology의 문제도 있지만, 일단 배우고 나서 따져 들어가야 할 과제이다. 기호학에서는 어원학적 접근방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제작 관습의 바탕을 이루는 코드화codification에 중점을 둔다. 이름짓기에서 처럼 코드화에는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개입된다.



물론 돌쇠의 이름만을 풀이하기 위해서 기호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를 분석하는 일은 보다 중대한 과제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 자체와 운명을, 우리이 삶의 기반이 되는 문화, 정치, 경제 체제를 우리의 삶의 방식 등을 결정하는 기호들을 분석하여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타ㅈ아내고 보다 나은 삶의 진로를 유도해 내는 일이 기호학의 과제이다. 이 만만치 않은 과제가 기호의 자의성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정보의 조작성, 진리의 허구성, 권력의 임의성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굵직굵직한 명제들을 낳았다.





진위성



앞의 인용문에서 에코는 <기호가 어떤 것을 표상하고 있는 동안,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고, 어디엔가 실제로 다른 곳에 존재해도 된다>고 한 후에, <그래서 기호학은 원칙상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여깃 <거짓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모든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호이고, 기호가 대표하는 어떤 것은 퍼스의 용어로는 물체, 오그돈과 라차즈의 용어로는 대상체이다. 이 인용에 나타나는 두가지 중요한 점을 논의해보자. 첫째는 물체 또는 대상체의 성질에 대해서, 둘째는 거짓의 성격에 대해서이다.



물체(혹은 대상체)의 존재 여부는 물체와 기호의 실존적 연계나 근접성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의미는 좀 더 광범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첫째로 물체란 반드시 물질적 실체일 필요가 없고 관념적 물체이어도 상관없다. 즉 대상성은 물질적 실체와 관념적 구성물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둘째로 물체는 실존하는 물체와 허구적인 상상물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즉 기호는 물질적인 것에서 관념적인 것까지, 존재하는 것에서 허구적인 것까지 무엇이든 대표할 수 있다.



기호의 이와 같은 엄청난 대표력 내지 표상력은 기호의 자의성과 더불어 기호의 무한한 생산을 허용한다. 실제로 수많은 가공적 기호들이 철학자, 수학자, 예술가, 미디어 종사자 등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진리, 정의, 무한, 허수, 용, ET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기호의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공상력과 창의력을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물질적 자연계와 우주는 유한한 것 같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공의 세계는 무한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대 미디어시대의 사람은 점점 자연을 떠나 환상적 가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過現實的 세계에 한없이 미혹되고 있다. TV가 보여주는 과실재성hyperreality과 과공간hyperspace이 TV 시대에 테어나는 아동들의 자연이 되고 있고, 신이 창조한 저밖의 자연(참자연)은 흥미 없는 제2의 자연으로 멀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기호의 유혹에 사로잡혀 인조기호의 세계에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꽃잎의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TV 화면에 나타나는 가공의 이미지들, 즉 닌자 거북이, 터미네이터, 비디오게임 쪽을 택한다. 정상배들은 가공의 통계숫자를 가지고 민심을 조작하고, 텅 빈 정치공약을 가지고 민심을 선동한다. 기기하게도 그런 것이 시민들에게 잘머혀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점점 가공적 기호의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거짓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에코가 말하는 거짓이 가공적인 것을 표상하는 기호의 기계적 능력만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을, 기호를 통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거짓까지도 뜻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조작을 모조simulation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호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능력도 있다. 이와 같은 조작을 비모조dissimulation라고 한다. 비모조는 두 가지로 작용할 수 있다. 있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과 없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있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은 신앙 같은 것을 일으킨다. 그러나 없는 것을 비모조화하는 것은 순수한 모조pure simulation로 거짓 중의 거짓이다. 비모조는 내놓고 하는 사기이기 때문에 거짓이 분명하여 진위판단의 원리가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순모조는 진위판단의 기준을 훼파하여 진실과 거짓, 실재와 가공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Baudrillard, 1988). 순모조는 현실성을 우회하여 기호에게 기호 스스로의 복제 재생산 능력을 준다. 보드리야르는 있는 것의 비모조에 의해서는 신학이 일어날 수 있지만, 순모조가 판을 칠 때는 신조차 자기 자신을 신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온 우주가 비결정성indeterminancy으로 바져든다고 했다. 파국catastrophe이 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갖는 이 역설paradox은 중요한 이원론적 진리binarism를 내포하고 있다. 거짓 없이 진실을 알 수 없고, 진실 없이 무엇이 거짓인가를 알 길이 없다(Weizsacker, 1980). 결국 진실과 거짓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기호 속에 함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기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거짓을 말하는 능력만큼 강력한 것이다.



기호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레마스가 <등가의 논리>라고 부르는 것을 살펴보자(Greimas, 1990).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표현과 다른 하나의 표현 사이에 존재하는 등가성을 가리키고 있다. 두 가지 표현 사이에 번안transcoding이 일어나는데 그 진실성이나 허위성은 등가성이 어느 정도 개재하느냐의 문제로 낙착된다.



의미작용이란 단순히 언어의 한 수준에서 다를 언어로 옮기는 조작이며 의미란 단순히 이러한 번안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좀 극화해서 말하면, 인간의 초언어적 담론은 단순히 일련의 거짓이고, 커뮤니케이션은 일련의 오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Greimas, 1990).



등가성의 크기가 진실과 허위의 문턱threshold의 높이를 정하는 기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푸코 Foucault(1977)가 말하는 진리의 상대론Relativistic theory of truth과 맥을 같이 한다. 푸코에 의하면, 진리는 항상 담론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항상 번안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항상 번안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번안과 담론에는 어쩔 수 없이 거짓이 기여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번안과 담론에 크던 작던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기호학은 기호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기호들로 하여금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도록 한다. <기호학자들에게는… 거짓과 진실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Greimas, 1990).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거짓과 진실이 만나는 場은 기호학자의 마음이며, 거짓 대 진실의 비율이 기호학자에게서 명확히 드러남을 뜻한다. 일반인에게도 이 장이 똑같이 펼쳐져서 기호학적 담론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때, 개인적 해석관례와 집단적 해석관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레마스는 전망한다.



공감대의 크기는 소위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크기와 같은 것이다. 상호주관성은 집단적 개념으로 어떤 집단에게 마치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우리느 ㄴ그것에 의해서, 오해와 거짓을 극복하고 이해와 진실을 향해 움직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호들, TV, 영화, 신문, 잡지 같은 현대 매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기호들, 우리를 한없이 유혹하는 광고나 선전문 속의 기호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여 거짓을 폭로하는 일이다. 우리를 항상 진실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 기호학의 윤리적 사명이다.





제3장



기호와 의미



도상, 지표, 상징



퍼스는 기호의 세가지 유형을 제시해 놓았다. 그에 의하면 기호에는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이들은 지금가지 논의된 것과는 다른 기호의 성격을 갖고 있다.





도상



대상체와 유사한 기호를 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상은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대상체와 비슷하게 보이거나 비슷한 소리를 내거나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꽃님의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증명사진은 꽃님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에 꽃님의 도상이다. 하지만 도상은 시각적 이미지만을 가리키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것을 포함한다. 앞장에서 말한 의성어들은 도상이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성우들은 역사적인 인물의 목소리를 감쪽같이 흉내내어 음성적 도상들을 만든다. 바나나의 인공 향료는 바나나의 도상이다. 한국 지도는 한국 영토의 도상이다. 제도판 위에 펼쳐진 설계도는 앞으로 만들어질 어떤 기계, 어떤 구조물의 도상이다. 교회
종탑 위에 높이 달려 있는 십자가는 2천년 전 골고다산 위에서 예수가 처형당한 십자가 형틀의 도상이다.



매우 중요한 도상의 체제는 표상문자(상형문자)들이다. 눈 目 자는 눈을 닮았다. 귀 耳 자는 귀를 닮았다. 달 月 자는 달을 닮았다. 로마 숫자 I와 아라비아 숫자 1 그리고 한자 一은 하나라는 의미르 FELS, 또는한 개의 손가락 같아 보이는 의미의 도상이다. <하나>라는 기의가 도상이라는 이미지 –즉 기표- 로 대표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바꿔 말하면 기의가 기표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도상은 표의문자가 된다. 기의와 기표가 합쳐져서 또 다른 기표로 되는 경우를 앞장에서 잠시 본 바 있는데, 표의문자가 바로 그런 경우의 기호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이미지와 관념은 같은 것이 된다.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도상들이 있다. 어떤 것은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어떤 것은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어떤 것은 예술을 위하여, 어떤 것은 산업을 위하여…, 수없이 많은 목적들을 위해 도상들은 만들어진다.





지표



대상체와 실존적 연결을 이루고 있는 기호를 지표라고 한다. 지표와 대상체 사이에는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연기는 불의 지표다. 손가락에 낀 반지의 다이아몬드는 부의 지표이다. 문고리에 남긴 지문은 도둑의 지표이다. 콧물, 재채기, 미열 등은 감기나 알레르기 같은 병의 지표이다. IQ 수치는 지능의 지표이다. GNP는 국가의 경제적 힘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통계 수치들은 어떤 현상들의 지표이다.



대명사 일반과 지시대명사(여기, 저기, 그것, 저것), 그리고 시제(어제, 내일)는 모두 지표이다.



지표는 우리 주변에도 수없이 많다. 도상과 마찬가지로 지표도 더러는 진실을 말하고 더러는 거짓을 말한다. 누더기(걸인의 지표)를 걸친 거지 왕자가 있는가 하면 무일푼인 주제에 빌려 입은 옷, 빌려 탄 차로 재벌 아들을 흉내내는 자가 있다.





상징



상징은 임의로 만들어진 기호이다. 그래서 기호와 대상체 사이에 어떤 연과이나 유사성이 없이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약속 또는 사회적 계약이 상징이 지니는 의미의 원천이다. 세계 각국의 말(언어)이 모두 상징이다. 학교 마크들은 상징이다. 아라비아 숫자 8(기표) 속에서 여덟을 의미한다고 기호 사용자들이 서로 동의한 것에 불과하다. 8자를 90도 회전시키면 무한수를 나타내는 ¥가 된다. ¥에는 8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어 있다. 두 가지 기호가 사실은 똑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약속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말로 개라고 써 놓은 글은 상징이다. <개>자에 개 같은 데라곤 전혀 없다. 약속으로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꽃님이란 이름은 상징이다. 꽃님을 직접 만나보면 꽃 같은 데라곤 한구석도 없는 얼굴이다. 다만 약속으로 얻게 된 상징일 따름이다.



자의로 만들어져서 약속에 의해 알게 된 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 역시 거짓을 말하는 데 쓰인다. 자의성과 규약이 상징의 일반적 성질인 까닭에 상징으로 일어나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현상들, 예컨데 지식, 관념, 이데올로기 등이 겉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론을 임의적으로 조작해서 얻은 동의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의하면 지리란 여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진리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진리는 근본적으로 기호 조작에 의해 탄생된 허구이다.



그러나 상징의 본래적 자의성에도 불구하고 상징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일단 상징을 약속에 의해서 배우고 습관화, 체질화하고 나면 상징은 그것의 한계를 넘는 크고 작은 고차원의 의미작용을 우리의 마음에 일으킨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1+1이 어떻게 2가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책 한 구너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지만 결국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은 1+1=2라는 사실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라는 것을 중학교 때 배워서 앍 있다. 고등학교쯤 가면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 같은 구체 위에선 180도 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에서 최근의 입체기하학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어쨋거나 이 모든 논의가 상징을 빌려 알게 된 것이다.



기어츠Geertz가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상징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우리가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이다. 인간은 상징의 세계에 태어나서 상징의 삼투작용을 체험하며 성장한다. 우리의 두뇌는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여 체화한 상징들의 보고이다. 그래서 많은 상징이 우리에게 어떤 의식과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불러일으킨다>는 뜻은 우리의 이성에 앞서, 먼저 일어났던 기호의 작용이 이미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상징의 자의성이나 규약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상징은 매우의미심장한 정념과 인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어머니 라는 세 음절의 말이나, 세 개의 글자 자체에는 어머니다움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어머니 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은 우리에게 온갖 정념을 일으킨다. 싯구들은 상징들로 되어 있는데도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고 음악은 상징들의 흐름인데도 우리를 열광하게 한다.



진, 선, 미 – 모두 상징이다. 위, 악, 추 – 역시 상징이다. 정의, 자유, 평화 – 모두가 상징이다. 이런 상징들의 대상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대상체는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구름처럼 잡히지 않는 관념의 조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런 것은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rt은 우리가 기호에 의해서만 인생을 의미 있게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누가 말했기 때문에 왼쪽으로 옮길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옮겼던 것도 사실이고 편한 인생보다는 어떤 위험을 무릎썼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그 모든 체험에 기호는 함께 있었고 우리는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기호의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공상하는 것만큼 기호는 그 울타리를 넓힐 따름ㅇ다. 우리는 언제나 기호의 이쪽(彼岸)에 갇혀 있다. 그리고 기호의 피안은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단일의미 : 다중의미



퍼스의 도상, 지표, 상징은 홀로 독립되어 있기보다는 흔히 어떤 조합을 이루고 있다. 가령 금연 표지는 담배의 도상과 금지를 뜻하는 사선을 가진 원으로 된 <도상-상징체>이다. 이 특별한 기호에는 단 하나의 의미만이 부여되어 있다. 이런 기호를 단일 의미체monosemy라고 한다. 여려 개의 의미를 품고 있는 기호를 다중 의미체polysemy라고 한다. 한자인 어버이 親 자는 다중 의미체이다. 이 글자는 세 가지 표의문자와 표상문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즉 <나무 木>와 <서있음 立>과 <봄 見>의 세 가지 기의가 하나의 기호 복합체를 이룬 것이 어버이 친 자이다. 그러나 이 어버이 親 자가 세 개의 글자로 되어 있어서 다중 의미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상징체가 품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다중 의미체인 것이다. 자식을 나무 위에 서서 목이 빠져라 날마다 기다린다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흥미롭게도 어버이 친 자는 어버이라는 뜻으로도 친하다 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최소한 두 가지 사전적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징은 다중 의미체이다.



기호라는 말 자체가 다중 의미체다. 사전을 찾아보면 기호의 정의가 스무 개도 더 된다. 대부분의 기호가 다중 의미체이기 때문에 다중 의미성을
기호의 일반적 특성이라고 보편화해서 이해해 두는 것이 좋다.


 

출처-김경용의 <기호란 무엇인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