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북부/치앙마이

치앙마이 지역에 있었던 고대왕국 `란나왕국` 이야기

태초 여행사 2007. 10. 25. 13:31

태국북부 치앙마이 `란나왕국`의 파란만장 역사……

 

여행 중에  대자연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에 가면 

그 수려한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내면에서 우러나면서

인간이 외소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나서 지나도

그 지역에서 느낀 감동의 여운이 오랫동안 가슴에 잔잔히 남는다.

동남아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의외의 곳에 숨겨진 멋짓

해변이나 산골마을의 아기자기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혹시, 여기가 에덴동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몸의 일부만 가리고 살았으니

겨울이 춥지 않은곳이고 푸른 나뭇잎이 항상 있는

열대 지방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파라다이스 같은 아름다운 자연과는

요즘말로 너무나 컨셉이나 설정에 에 맞지 않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몸 바쳐 살고 있는 사람일상과 마주치면,

 

때로 어이없을 만큼 황당한 역사나 전설 그리고 현실과

맞닥트릴 때가 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환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기막히게 치졸하고 복잡한 인간사가 지구상에 많은 것 같다.

 

 

태국북부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지역은 세계최초로 벼가 발견된 고장이다.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 `씹썽파나` 라고 회자된 지역이다.

씹썽은 12 라는 태국어이다. 

1 2천 개의 벼농사 지을 땅이 있다는 비옥한 지대라는 의미이다.

 

`흙에는 금이 있고, 논에는 벼가 있고, 물에는 물고기가 있다`는 말이

한마디로 이곳이 풍료로운 자연환경을 가진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중국 남부지역 일대와 티벳지역 그리고

심지어 만주나 한국에서 온 것으로 학계에 보고된 종족까지 정착하여

가히 소수민족의 전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1263이 지역에서는 (우리 조선시대 때)`맹라이 왕`이 등장한다. 

강력한 리더쉽으로 고대 크메르-앙코르에 제국과 대항하여

`란나왕국`이라는 독립국가를 형성하였다.

 

어찌나 용맹한지 몽고족이 세운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쳐들어 왔을 때도 대항하여 독립을 지켜낼 정도로 화려하고 자랑스런 

역사를 가진 란나왕국이었다. 대단한 왕국이었던 것이다.

세계를 재패하던 몽고의 말발굽이 타이반도를 유린할 뻔 했지만

태국 북부지역에 있던 란나왕국이 용맹스럽게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맹라이 왕`  사후에 여러대 왕을 거치면서 왕실이 기울었다.

한 때는 이웃 라오스있던 사촌을 왕으로 모셔오게 될 지경이였다. 

사촌이 왕으로 란나왕국을 일년동안 나라을 다스렸는데

정사가 여러가지로 골치 아프다고 하면서

란나왕국의 승려와 책과 보물과 지배층을 이끌고

라오스로 가버렷다. 그래서 

란나왕국은 지식층 지도층의 붕괴로 한 동안 (수십년 간) 

내전에 휩싸이기도 했다

골치 안프다고 좋은 거 다가지고 지내 집으로 가버리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그 이후 미얀마에서 강력한 왕국 형성되어

태국의 남부 방콕근교 아유타야 지역까지 쳐들어와서 

아유타야가 초토화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도 북부 치앙마이에는 

란나왕국이 명맥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이 북쪽의 자그마한 왕은 모든 불상의 목을 치고 불탑을 부수는

포악한 미얀마에 강력히 저항하며 국가를 굳건히 유지시겼던 것이다.

대단한 단합과 화합의 정신이었다.

 

그렇게 미얀마와 대치하며 왕국을 유지하였다.

1774년 경에는

태국북부 치앙마이 치앙라이 지역  란나왕국의 `카빌라 국왕`이

태국남쪽의 방콕 의 에 있던 `짝끄리 왕조`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미얀마를 타이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도 하였다.

당시 그들의 용맹스런 항전이 없었다면

태국은 미얀마에 완전히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얀마를 퇴치시키고 나서

`카빌라 왕`은 란나왕국을 1813년까지 31년 간 통치하였다.

그동안 많은 북방과 산간의 소수민족들을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평지로 내려와 평안히 살게 하여 나라를 융성케 하였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인  프라야 타마랑카왕이

태남부 방콕에 있던 `짝끄리 왕조 라마2세 왕`에게

흰 코끼리와 함께 나라를 통째로 바쳐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작동한 것이다.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

 

물론 그 이후로 란나왕국은 스스로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미얀마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독립국가를 형성하려고 시도하였고 

한편 도시재건에도 진력을 다  하였으나

태국남부 방콕에 있는 `짝끄리 왕조`의 치밀한 견제로

1935(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 전에) 태국의 한 도(都:도읍 도)

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로써 700년간 만고풍상속에 유지되었던 란나왕국은 사라지게 된다.

 

치앙마이와 치앙라이 지역을 다녀보면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사각형의 성곽과 무너진 돌담 등

곳곳에 유물과 유적이 널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지붕처마 끝이 특이한데

여러 겹의 촘촘한 지붕의 끝이 하늘로 엑스자형으로 뻗힌

독특한 형태을 띠고 있다.

또한 건축물 내부에서 단단한 티크나무에 새긴 화려한 불상과

정교한 조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 `란나왕국`은

건축이나 디자인의 한 형식인 `란나 스타일`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소수민족은 뿔뿔히 흩어져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