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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가 경제공황시기인점과 시사점은 ...-다음 아고라 글

태초 여행사 2010. 1. 20. 09:17

 

 

 

세계 대공황 (1929)
- 1~2차 석유 파동 (1970년대)
- 블랙먼데이 (1987)
-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연쇄 파산 (1988~1990)
- 걸프전쟁 (1991)
- 유럽통화위기 (1992)
- 멕시코 페소화 위기 (1994)
- 아시아 외환위기 (1997)
-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파산 (1998)
- 닷컴 버블 붕괴 (2000)
- 9·11 테러 (2001)
- 엔론 회계부정 사태 (2002)
- 미국발 금융위기 (2008)














1929년 중앙은행 총재들은 왜 대공황을 막지 못했나
전후 인플레이션을 막고 경제를 제자리로 되돌리려
금본위제 복귀 시도했지만 결국 그것이 파국을 불렀다

 



















금융의 제왕리아콰트 아메드著다른세상 펴냄
중ㆍ고등학교 때 역사교과서는 왜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까. 역사 과목은 유난히 선생님 설명 방식에 따라 흥미 여부가 좌우됐다. 재미있는 역사 강의의 특징은 바로 `이야기`가 있다는 것. 용어나 개념 설명 위주의 수업보다는 역사적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개별적인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업이야말로 졸음을 쫓는 특효약이었다.

리아콰트 아메드의 `금융의 제왕`은 `역사는 이야기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장편 역사물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점은 1914년부터 1944년까지 30년간. 장소는 유럽과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 세계다.

여기까지만 보면 1차 대전 이후 전후 세계사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놀랍게도 당시 중앙은행 총재들이다. 중앙은행 총재들을 통해서 본 경제사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중앙은행 총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들이다. 언론 노출 빈도는 높다지만 실제 그의 개인사나 철학은 알 길이 없다. 시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슈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하고 있기 때문.

오죽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전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외부에 절대 알리지 못하도록 했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봉인돼 있는 100년 전 네 명의 중앙은행 총재들을 먼지 쌓인 고문서 속에서 끄집어냈다. 예민하고 비밀스런 성격의 몬태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 외국인을 혐오하고 의심이 많았던 에밀 모로 프랑스은행 총재, 눈부신 재능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오만했던 할마르 샤흐트 독일제국은행 총재, 넘치는 활력과 강인한 의지의 가면 아래 깊은 상처와 누적된 피로를 숨기고 있었던 벤저민 스트롱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바로 그들이다.


















노먼 영란은행 총재는 런던 대저택에서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독신으로 살아가는 기인으로 묘사돼 있다. 어릴 때부터 편두통을 앓으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던 왜소한 인물이지만 1800년대 후반 민병대에 입대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군인 출신 중앙은행가였다. 그는 전쟁 후 영국의 미지불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면서 영란은행의 기초를 닦았다.

독일제국은행의 할마르 샤흐트 총재는 당시 독일의 양대 은행 중 하나인 드레스드너은행에서 두각을 나타내 중앙은행 총재로 발탁된 인물이다. 18세기 영국 중상주의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샤흐트는 풍족한 배경 때문에 당시 경제상황을 안일하게 바라봤던 것으로 평가된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벤저민 스트롱은 첫 번째 부인의 자살과 큰딸의 사망 등 가정사는 불운했으나 이를 딛고 일어나 미국 금융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강건한 인물로 묘사된다.

프랑스은행 총재 에밀 모로는 전형적인 프랑스의 고위 공직자였다. 살인적 경쟁의 고시를 뚫고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정치력까지 겸비했으나 후에 금본위제의 실패로 비난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이들 네 사람은 국제금융의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철학적 기반과 방법론은 달랐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정책목표는 한 가지였다. 전후 인플레이션을 막고 경제를 제자리로 돌려 놓자는 것.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금본위제로 복귀를 시도했고 1920년대 중반 잠시 성공한 듯 보였다.

각국 통화는 안정을 되찾았고, 자본은 세계 곳곳으로 자유로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황 이면에서 금융시스템은 점점 무너져 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안전장치라고 믿었던 금본위제는 오히려 그들을 구속했고, 세계 경제는 대공황의 깊은 늪에 빠지게 됐다.

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워낙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사관(史官)의 주관적 판단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길이 없다는 게 흠이다.

예를 들어 깐깐한 성격에 평생을 노총각으로 늙어간 것으로 묘사돼 있는 노먼 영란은행 총재는 이 책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24년간 중앙은행 총재를 지내면서 정신과적 병력까지 얻을 정도로 생각이 깊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정작 궁금해지는 인물이 따로 있다. 바로 저자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엄청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하버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저자 리아콰트 아메드는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다가 지금은 투자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저자의 지적 토양이 영미권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책에서 독일 중앙은행 총재에 대해 다소간 왜곡이 있는 것도 감안하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사명감으로 팔을 걷어붙여 주지 않았다면 쉽게 맛볼 수 없는 콘텐츠다. 이 책의 다양한 수상경력은 그 수고로움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블랙먼데이 [Black 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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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제용어사전



미국 뉴욕에서 주가의 대폭락이 있었던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을 가리킨다. 이로 인하여 세계적인 주가폭락이 있었고, 쌍둥이적자, 즉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안고 있는 미국경제에 대한 불신감이 던져졌고 공황론까지 제기되었다.

유럽 통화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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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통화가치 폭락에 직면한 영국파운드화와 이탈리아리라화가 유럽통화제도환율조정체제(ERM)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야기된 극심한 혼란현상을 말한다. 유럽통화위기는 방대한 통일비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막기 위해 고수한 독일의 고금리가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독일의 고금리는 유럽의 돈을 흡수, 각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렸는데, 이에 맞서 유럽 각국이 자국통화 방어를 위해 연쇄적으로 금리를 인상, 그것이 유럽 경제의 불황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저축대부조합(S&L)










savings and loan association 우리나라의 상호신용금고에 해당하는 미국의 지역 금융기관이다. 주로 지역주민들의 소액 예금을 모아 주로 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 대출로 운영한다.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연쇄 파산 (1988~1990)


○ 1988~1990년 저축대부조합이 연쇄 도산하면서 1386개 은행이 문을 닫음


○ 당시 저축대부조합(S&L)이 연쇄 도산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RTC를 설립해 40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 700여개 예금기관의 부실채권을 매입


* 10년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IMF)때 자산관리공사와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사용한 방법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위기(1989년8월, 2천억달러<이하 2008년달러 기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80년대와 90년대 초 저축대부조합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1989년 2천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책을 발표했다.1천개가 넘는 소규모 저축대부조합이 문을 닫은 후 1995년이 돼서야 사태가 진정됐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저축대부조합의 위기 원인으로 변동고금리와 무분별한 대출 관행, 급격한 규제철폐, 느슨한 관리감독 등을 꼽고 있다.

 













경제위기 해결, 전쟁이 묘수?

미국 경제와 전쟁의 역학관계




뉴스일자: 2009년02월01일 00시00분







전쟁과 경제, 특히 미국 경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논란은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세계 경제가 큰 폭으로 위축될 때마다 ‘전쟁을 통한 해결 방안’은 어김없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지난 연말에도 일부 리더 그룹에 속한 이들은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전쟁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전쟁과 경제, 특히 미국 경제와의 역학관계를 조사했다.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격을 두고 국제 사회가 논란에 휩싸였다. 단순히 가자 지구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 ‘이란’을 전쟁에 끌어들여 석유 자원을 확보하고, 전쟁을 장기화시켜 구형 무기 소비를 통해 미국의 경제 부흥을 노린다는 가설까지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전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스라엘은 최근 휴전을 선언했고, 팔레스타인은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따라서 양측의 대립은 여전히 지속되는 상황이고,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중동의 화약고임에는 틀림없다.
이스라엘을 통한 미국의 전쟁이 머지않아 가시화될 것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바로 중동 국가들이 보유한 ‘석유’다. 특히 석유의 보고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이란’을 최종 목표로 지목하고 있다. 이런 논란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국적 석유 회사인 셰브론의 부회장은 최근 “중동은 우리 산업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커져만 갈 것이다. 세계 석유 매장량의 2/3와 세계 가스 매장량의 1/3이 중동에 있다. 이 수치도 파악된 매장량일 뿐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바로 중동이 보유한 석유가 미국을 비롯해 세계 경제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전쟁이 장기화된다고 가정한다면 미국이 얻을 이익은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주가 폭등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이라크 전쟁 당시와 매우 유사하다. 때문에 1차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의 발발과 지속은 앞으로의 주가에 매우 긍정적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과거 사례를 분석해보면 미국의 이라크 공습(1991년)은 당시의 다우지수에 큰 호재로 작용했다. 공습 이후 주가가 한 달 만에 500p 이상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을 정도다. 미국의 군수 산업, 즉 방위 산업체들과 철강업체들의 주가 상승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점은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내수 산업을 부양할 수 있는 최고의 촉매제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의 다우지수 역시 전쟁과 맞물려 급격한 상승세를 이어갔고 이는 지난 2007년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저금리 기조와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시장의 호황(수출 및 소비), 전쟁을 통한 미국 내수 산업 활성화가 일치했기에 가능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지난해 6월 이란을 염두에 두고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미국 이외의 서방 선진국들은 양국의 군사 작전, 즉 전쟁 가능성을 놓고 어느 쪽 손을 들지에 대해 매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란이 보유한 핵무기로 인해 대대적인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상군을 투입하는 장기적인 국지전’은 가능할 것이란 예측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군수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는 하나의 동력으로 사용할 것이란 관측도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미국은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전쟁을 통해 산업과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미국의 전쟁과 경제가 어떻게 맞물려왔는지 짚어보자.
사실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만큼 미국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 최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 이류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변방이었던 미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도약한 계기는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누렸다. 이어진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는 초강대국으로 거듭났으며, 소련과의 냉전에서도 승리하며 그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다.
주목할 점은 미국이 세계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모두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즉, 전쟁을 통해 미국은 경제적으로 커다란 효과를 누리며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의미다. 한국 전쟁(1950), 베트남 전쟁(1964~1972), 엘살바도르 개입(1981), 걸프 전쟁(1990), 소말리아 개입(1992), 유고연방 개입(1999), 아프가니스탄 침공(2001), 이라크 전쟁(2003)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미국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1980년 이전의 전쟁과 미국 경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은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항공기, 선박, 전차와 같은 군수 관련 산업은 꾸준히 성장했다. 실업자들은 이런 산업에 흡수되거나 군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실업률은 줄고 GNP는 증가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8년에서 1950년에 이르기까지 실질 GNP 성장은 연평균 6.5%에 달했다. 이는 미국의 호황기 평균치보다 50%가량 높은 수치다.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전쟁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실행되고 ‘큰 정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1950~1953년에 이르는 기간에 국방 지출이 약 3배 정도가 늘어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한국 전쟁(1950)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종료되면서 미국의 위기는 시작됐다. 전쟁 기간과 전쟁 직후에 나타난 제조업 활성화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 분위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노동력 부족으로 상승했던 임금 성장이 줄었고, 투자는 위축됐다. 이는 실업률 증가와 GNP 증가율 감소로 이어졌다.
침체기를 걷던 미국은 1965년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베트남전 참전은 단기간이지만 미국의 경제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줬다. 약 2년 동안에 걸쳐 미국의 GDP는 약 9.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전쟁 비용 지출은 늘어났다. 기존의 사회복지 정책들은 군비 확보를 위해 삭감되거나 폐지됐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쟁을 통한 군인 고용 등이 이뤄지는 실업률 수치를 제외하고 물가상승률, 재정수지, 생산성 등의 수치는 모두 악화됐다. 제조업과 비제조업 분야 모두에서 성장은 둔화되었고, 유럽, 일본 등이 점점 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부터 석유 위기가 시작됐다. 중동 국가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하고 경쟁을 제한하며 생산량 감축을 통해 가격 인상을 꾀했다. 그리하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원유 가격은 약 2배에 걸쳐 상승했다. 미국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고,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찾아왔다. 실제로 당시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0%를 넘었고, 실업률은 약 2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위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당시 미국 정부는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세금을 줄일 때 경제 활동의 의욕이 고취되고 경제 성장이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세수(稅收)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미국의 정책은 미국 내 경기의 회복과 물가상승률 둔화에 한몫하기는 했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세수는 상승하지 못하고 연방 정부의 지출은 늘어 국가 재정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경상수지 역시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 바 쌍둥이 적자에 빠져 허우적댔다.

걸프전 및 이라크전과 미국 경제
1990년에 이르러서도 국가의 재정난은 여전했다. 이 당시에 미국은 전형적인 침체기를 걷고 있었다. 기업들은 위기를 맞으며 기업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고, 많은 직장인들이 직장을 잃었다. 이런 시기에 중동에서는 걸프전이 발발했다.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쿠웨이트 왕국을 침공한 것이다. 당시 쿠웨이트는 고유가 정책을 바라며 산유 감축을 원하는 이라크와 달리, 석유 생산량을 늘리며 석유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라크는 증산 정책에 대한 피해액 150억 달러 지급, 전시 차관금 100억 달러 면제를 쿠웨이트에 요구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고, 이전에 쿠웨이트와 얽혀 있던 국경 문제까지 연관되어 이라크는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 침공에 나섰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쿠웨이트 손을 들어줬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석유 값의 안정과 일정량의 석유 확보를 위해서다. 1980년대 후반에 석유 값은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이런 구도를 깨려는 이라크에 대한 응징인 것이다. 또한 세계 2위의 원유 매장 국가인 이라크를 정치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석유의 지위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후세인의 도발로 상승 중이었던 유가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와 관련이 있다. 군산 복합체는 군수 산업계와 정계가 경제적 이득으로 서로 얽혀 있는 관계를 뜻한다. 군수 산업은 이전의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대립 관계를 틈타 크게 성장했고, 정치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 국방과 관련된 산업 자체가 미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탈냉전 시대가 되면서 군산 복합체에 위기가 닥친다. 따라서 미국 입장에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건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 다시 말해 재래식 무기를 판매할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도 국가 경제로 볼 때 일자리의 창출과 무기 재고를 소비할 좋은 기회였기에 즉각적인 참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미국이 걸프전에 참전한 이후 경제는 다시 안정세에 들어선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40달러에 이르렀던 유가는 다시 20달러 이하에서 안정됐고, 소비 심리는 상승했다. 또한 미국의 군산 복합체가 만들어낸 미사일과 F-16 전투기와 같은 고가 제품들은 대량 수출됨으로써 이후 몇 년 동안 호황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걸프전이 석유 가격의 안정에 기여하긴 했지만 불황 자체를 구제하지는 못했다. 1992년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부터 미국은 모든 산업의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다. 기존의 산업화 단계가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와 함께 세계화 또한 급속히 진행됐다. 상품과 서비스, 자금, 노동력, 정보 등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유례없는 속도로 GDP가 증가됐다. 하지만 약 2000년에 이르기까지 유지된 이런 경제적 호황은 2001년 이후 세계적인 불황으로 바뀐다. 2000년에 12.6%가 상승한 세계 교역량 증가율은 2001년에는 -0.1%, 2002년에는 2.1%에 그쳤다. 이때 9·11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심장과 같은 도시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에 경악하며 빈 라덴 토벌 작전을 펼친다. 200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리고 2002년에 이르러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개발하고 있는 국가를 ‘악의 축’으로 부르며 이들과의 투쟁을 선포했다.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 중 하나인 이라크는 이후 미국의 견제를 받았다. 그리고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전쟁은 5월에 이르러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이라크 전쟁의 이유 역시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에 벌인 걸프 전쟁의 숨은 이유, 즉 석유 자원 확보와 군산 복합체의 경제적 이익 증대라는 목적이 여전히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여전히 자국 석유 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020년에는 65%까지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수입량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동에 대해 경제적인 압박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라크를 다시 한 번 침공함으로써 적대 국가를 위협하고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 경제적 안정을 가져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 전쟁이 일찍 종결된 후, 원유 가격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그 후 미국 경제는 2001년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군수업체에게 전쟁은 최고의 PR수단
전쟁과 연관된 산업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또한 전쟁은 이러한 산업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미국과 같은 국가에는 전쟁 무기를 생산하는 많은 군수 산업체들이 있다. 이들의 수는 어느 정도나 될까? 국토가 거대하거나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많아야 10개 정도다. 군수 산업은 많은 자본과 기술력을 요구하는 분야고 수요량은 적다. 따라서 시장에서 남아 있을 수 있는 기업의 수는 적지만 그 규모만큼은 크다. 실제로 미국 시장에서도 현재 남아 있는 대형 군수 산업체는 대략 10여 개 남짓이다. 따라서 기업의 수가 소수이기 때문에 대부분 독점 형태를 띤다.
그렇다면 수입 구조는 어떠할까? 군수 산업체의 제품 중에서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고급 전투기, 전차, 전투함이다. 따라서 이들의 수요는 대부분 국가로 한정되어 있다. 이는 공급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변한다고 해서 단기간에 공급을 신축적으로 조절하기가 어렵다. 워낙 대규모를 요구하는 ‘덩치 큰 산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점 성향의 시장으로 군수업체는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일본에서 지난 1976년에 발생한 록히드 사건은 대표적인 군수 산업체의 로비 사건이다. 록히드사는 당시 수상이던 다나카에게 전일본항공(ANA)에 록히드 항공기를 구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대가로 5억 엔이라는 로비 자금을 댔다. 이러한 무기 로비는 미국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이 일으킨 많은 전쟁은 기존의 재화, 즉 무기를 소비하기 위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집행한 지도자들의 상당수는 군수 산업체들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전쟁은 군수 산업체 입장에서는 최고의 광고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최고의 성능을 내는 신제품은 다른 나라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이는 곧 판매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곧 재화의 소비 과정이면서 효과적인 PR의 역할까지도 수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여러 가지 경제적 효과를 유발한다. 군인의 고용으로 인한 실업률 감소, 전쟁 후에 파괴된 국가를 재건할 때 발생하는 산업 생산력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잃는 것도 많다. 전쟁이나 군비 확장은 국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금은 경제 주체들의 복지를 감소시킨다. 시민의 복지나 경제적 이익과는 별개가 되는 것이다. 세금이 증가할수록 시민들의 소비 증가는 둔화된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이나 물자 부족으로 이어져 빈민이 늘어나고 사람들을 굶주리게 한다. 사회복지에 쓰여야 될 세금이 국방비로 전환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전쟁이 경제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 마이크 번스틴은 “냉전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은 공공재 지출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이것은 냉전 후 미국의 경제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시 자국 영토에서 치열하게 싸운 국가들은 전쟁 후에 높은 산업 생산과 재건으로 인한 고용의 확대, 이로 인한 소득 증가, 그리고 전쟁을 통한 기술력의 발전이라는 경제적 효과를 누렸기 때문이다.
최근까지의 미국의 행보 역시 이러한 경제적 마인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전쟁을 통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얻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제 활동의 수혜자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 내지는 시민이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전쟁은 불행한 일이다. 전쟁은 인플레이션, 소비재 부족, 교육 기회 박탈, 재산 파괴, 인명 손실과 같은 경제적인 손실을 낳으며 결국 사람들의 경제적 후생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페소화 폭락과
한국경제의 미래


이 철 상 / 전국연합 정책실

멕시코는 원래 고대마야제국의 후예들과 식민지를 개척하러 찾아든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이 함께 건설한 나라이다. 멕시코는 만성적인 정치불안과 계
속적인 식민수탈로 인하여 대부분의 국민이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며 쌓여
가는 외채로 인하여 살기 어려운 나라로 지내왔다. 그것이 최고조에 달한
것이 지난 80년대초반이었다. 당시 외채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하여 더
많은 달러가 필요하게 되고 달러에 대한 일상적인 초과수요로 인하여 페소
화의 달러화에 대한 가치는 하락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달러로
수입해야 하는 수입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다시 인플레를 조장
하게 되고 멕시코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 결국 외채지불 정지선언을 하
기에 이르렀다.
이런 엉망이던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멕시코가 선택한 것은 멕시코 경제의
국제화와 세계화였다.
86년 가트에 가입하는것을 시작으로 88년 살리나스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
서 본격적인 경제개방과 외국자본의 유치를 꾀하였으며 이것의 완성으로서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NAFTA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멕시코의 노력은 일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수많은 외국자
본이 가장 유망한 투자지로서 멕시코를 꼽게 되었으며 멕시코의 산업과 경
제는 초고도의 성장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선진국들의 경제협력 모임인
OECD(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하므로서 개발도상국의 울타리를 넘어 본격적
으로 선진국의 대열로 들어선듯이 보였다.
그러나 작년 12월 19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이 근거지인 라칸돈 정글
에서 전쟁재개기자회견을 가지는 시점부터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의 정정불안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감
지한 다수의 투자자들은 신속히 자신의 투자자본을 회수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평가절상되어있던 페
소화의 가치는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페소화가 가졌던 힘은 다름아닌 최저생활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멕시코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과 이에 기반한 값싼 노동력이 가져온 멕시코
산업의 국제가격경쟁력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NAFTA를 통해 북미 자유무
역이 실현되게 되면 그야말로 황금같은 시장인 미국을 바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시장접근성을 보장받게 된다.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
춰질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적 경제침체의 늪에서 멕시코만
큼 좋은 투자지는 없어보였고 수많은 자본들이 멕시코로 모여들었다. - 우
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벌써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멕시
코 현지에 칼라 TV공장을 서둘러 건설한 삼성이나 대우 한라중공업, 높은
수익을 보장해주는 멕시코 정부의 장단기 채권을 구입한 은행들은 그 투자
금액이 줄잡아 수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국내은행들은 가만히 않아 수백억원을 날리게 된 것이다. 당연히 서둘러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나섰지만 이미 스스로의 짧은 안목에 의하여
소잃고 외양간고치는 식이 되어버렸다 - 이렇게 모여든 외국 자본은 일시
적으로 멕시코의 경제를 양적으로 팽창시켰으며 마치 멕시코가 선진국의
문턱에라도 들어선 양 착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거품이었으며 국민의 희생과 장기집권자들의 허장성세 그리
고 외래 자본의 탐욕이 만들어낸 한토막의 희극이었다.
이러한 희극의 전모가 드러난 발단은 언제나 역사의 진실을 향해 움직여가
는 민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작년 1월 1일부터 별다른 농업대
책없이 우르과이 라운드 협정을 합의하려는 살리나스 대통령에 맞서 마르
코스라는 농민군 지도자에 의하여 조직된 농민봉기가 발생하여 많은 사상
자를 내며 근 1년을 멕시코 집권세력에게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주며 진행
되어왔다. 그들은 초기에 토지제도의 개혁과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봉기하
였지만 싸움이 장기화 되면서 극빈층과 피억압계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마야 원주민의 정치적 정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몇차례 살리나스
대통령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밀림과 마야 원주민 마을을 중심으로 완강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초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쉽게 진압이 될 것이라
고 예상하였던 서방 투자자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벌써 작년부터 느끼
고 있었다. 어쩌면 현 집권 제도혁명당이 효과적인 민중통제력을 상실할지
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3월 23일 저격되면서 이러한
정치위기는 가중되었다. 이때부터 세계금융시장에서의 멕시코 주식과 공채
의 시세는 폭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진행된 선거에서 현 세디요 대통령
이 무난히 당선되기는 했지만 역시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려 2만여명이 가
두시위를 벌이며 부정선거 규탄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서
방 투자자들은 새로 당선된 세디요 대통령의 경제발전과 정치개혁공약에
기대를 걸면서도 과연 값싼 노동력과 최고의 시장접근성이라는 장미빛 전
망이 내일도 계속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내 작년 12월 19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지도자 마르코스의 기자회
견을 통하여 전쟁재개선언을 하자 이러한 우려는 즉각 현실화되었다. 선언
직후 하루만에 페소화의 가치는 13%하락하였으며 12월 20일부터 27일 까
지 전쟁재개선언 일주일만에 달러당 3.4페소에서 달러당 5.6페소로 절반 가
까이 페소화의 가치는 급락하였다. 곧바로 일주일만에 멕시코의 일부 소비
재의 가격은 60% 가까이 치솟았으며 주식시장은 연일 곤두박질치기 시작
하였다. 이렇게 되자 살리나스의 고금리정책과 세계화 시장개방등 피나는
노력으로 높여온 페소화의 인기는 추락하였고 멕시코 공채는 더이상 인기
종목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서 시작된 파장은 계속해서 조급한 투자자들이
서둘러 자신의 보유주식과 채권을 매각하게 만들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페
소화의 가치?더욱더 폭락하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악
순환은 단시일내에 세계금융을 혼란에 빠뜨리며 멕시코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갔던 것이다.
클린턴은 애써 태연하게 "단기유동성의 문제일뿐 멕시코 경제의 미래는 걱
정없다"고 자위하며 지원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
것을 결코 우연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멕시코 경제가 거품이었으며
국내 정치불안이 해결되고 다시 안정적인 투자여건을 조성해내지 않는 한
날아간 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극적인 외부개입으로
설혹 잠시 위기가 진정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라
는 것이다. 실제로 IMF와 IBRD 그리고 미국의 중앙은행까지 동원하여 해
결책을 제시하고 벌써 180억달러 가까이 쏟아부었지만 위기의 끝은 잘 보
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남미 국가에는 직접적인 파급력을 가지고, 유럽
과 아시아에는 간접적인 영향을 주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다. 벌써 한국에서도 그러한 간접적인 여파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1월
13일 한국증시는 24.18포인트 하락하였다.

페소화 가치의 하락으로 급격하게 모습을 드러낸 세계 금융과 경제 혼란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더불어서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나라에 주는 교훈점을 찾아야 할 것
이다.
하나는 WTO창설과 APEC 그리고 NAFTA 등 마치 그동안 침체일로를 걷
고 있던 세계제국주의 경제에 새로운 활로가 개척된 것처럼 대안으로 이야
기되는 자본시장개방을 필두로한 자유무역질서와 시장개방 국제기구의 창
설이 과연 우리의 대안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영원히 무너
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구조적 모순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이는) 제국주의와 자유시장에 대한 환상을 깨뜨림으로써 근본적 사회
개혁에의 지향과 의지를 확고히 하는 문제이다. 멕시코를 비롯하여 현재
페소화 가치하락으로 태풍권에 든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제 쉽게 세계경제
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역내무역의 자유화바람과
세계적인 자본시장개방추세는 그동안 고율의 관세에 묶여있던 새로운 시장
을 개척하게 되고 자본이 모자라 개발이 안되왔던 한편과 투자할 곳을 찾
지 못하여 묵혀두던 자본이라는 한편이 자유롭게 장벽을 허물어 만나게 됨
으로써 도식적으로는 세계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순진한 사람
들은 한가지 변수를 더 추가하여야만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민중이라
는 변수이다. 기실 경제지표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감을 주며 마치 묘한 마
술이라도 숨어있는 양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러
한 숫자놀음이 결코 진실을 가두어 둘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상품교역만을 통한 비효율적인 GATT 수탈체계 가지고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침체하고 모순이 심화된 제국주의 자본이 더이상 버틸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동구 사회주의권의 변화로 인하여 단기적으로
조성된 미국중심의 패권을 바탕으로 NAFTA와 같은 형태의 심화된 국제무
역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통해 제3세계에 직접투자를 통한 보다 효과적인
수탈체계를 구축해내려는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
3세계 민중에게는 더욱 큰 고통의 강요이다. 수탈당하고 임금억제를 위해
탄압 당하는 민중들은 그리 큰 경제이론이 없더라도 곧바로 그들의 삶과
투쟁을 통하여 허구적으로 조작된 거품경제의 진실을 드러내놓고야 마는
것이다. 이것이 결코 멕시코만의 문제로 그치라는 법은 없다. 다국적 자본
에 의한 집요한 제국주의의 세계적 수탈은 이제 NAFTA 보다도 수십배 큰
규모의 WTO라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진행될 것이며 이속에서 필연적으로
제3세계 각국의 정치불안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그럴듯한 세계
무역질서를 멕시코의 경우와 같이 일거에 일대혼란에 빠뜨릴 것이며 계속
해서 자국의 모순을 제3세계로 이전하여 목숨을 연명해가려는 제국주의 자
본의 숨통을 조여갈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진실은 발효 1년을 맞으며 자
국에 불리한지 유리한지를 둘러싼 미국인들의 NAFTA에 대한 논쟁이 잘
보여주고 있다. 미 상무부는 지난 9월 까지 NAFTA로 인하여 13만명의 미
국인이 새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성과를 주장하는 반면 미
의회 양원 합동 경제위원회는 NAFTA의 역할에 대하여 부정적 의견을 내
놓았다. NAFTA의 영향으로 1만명의 미국인이 직업을 잃었다고 분석했다.
NAFTA가 저임 사업체의 멕시코이전을 촉진함으로써 나타는 결과라는 것
이다. 페소가치하락에 대하여서도 이들은 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반대론자들은 페소가치의 하락이 미국에 수출하는 멕시코 상품의 가격을
낮춰 멕시코 상품의 미국내 유입을 증가시킴으로써 미국인들은 직업을 잃
게 될 것이라고 바라보는 반면 찬성론자들은 페소화의 하락으로 인하여 멕
시코 국내에 15-20%에 이르는 물가상승률이 뒤따르고 이는 멕시코 노동자
들의 실질임금 하락으로 이어져 파업투쟁등 산업불안과 정치불안만을 낳게
됨으로써 결코 멕시코가 경쟁력이 강화되는데 도움이 되지만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우스운 논쟁의 핵심주제는 찬성론자이든 반대론자이든
결국 미국내에서 발생한 이윤착취의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역내 자유무역의
실시와 멕시코에로의 직접투자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듯이 보였으나 결
국은 멕시코 경제의 붕괴로 이어져 다시 이를 부양하기 위하여 많은 (180
억달러에 이르는)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한계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실업자는 실업자대로 증가하고 멕시코 민중은 NAFTA체제하의 급격한 수
탈로 인하여 사지로 내몰리고 말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황금알을 꺼내려고 거위의 배를 가른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세계화,
자유경쟁체제의 확립이 그다지 침체한 제국주의 경제의 회생대안이 될 수
없음을 현재의 멕시코는 온몸으로 처절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
러나라들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의도대로 잠시 더 거품경제가 발전하여갈 수
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민중이 얼마나 오래 견뎌내는
가 그들이 몇년 더 억압과 수탈에 길들여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
게 얼마나 효과적인 투쟁조직과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언제쯤
항쟁을 시작하고 언제쯤 투자자들이 더이상 고율의 이윤을 보장해주지 못
하는 그곳을 포기하고 재빠르게 떠나갈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클린턴
은 이번 문제를 단기유동성문제 운운하며 우연적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지
만 결국 미국 경제의 전망이 별로 밝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자위하
려는 몸부림이다.
한국은 여러모로 멕시코와 너무도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다.
스위스의 민간 경제연구소인 로잔경영개발연구소와 세계경제포럼이 선진국
과 개발도상국 4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발표한 세계경쟁력 94년 연례보고서
에서 한국과 멕시코는 나란히 24등과 26등을 차지하였다. 멕시코가 얼마전
개도국의 오명을 벗고 가입한 선진국 경제협력기구인 OECD에 가입하였는
데 한국은 이제 96년에는 가입하겠다는 용틀임을 하고 있다.
94년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은 경쟁력있는 농촌을 건설한다는 명분아래
원주민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묵시적인 이농을 부추겼던 것은 한국의 농
정과 너무도 흡사하다. 86년이전까지 상당히 폐쇄적이었던 멕시코는 세계
화 정책이후 문화면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격었다. 오케이 굿바이가 서서히
일상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심지어 명절까지도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모방하는 현상이 유행했다.
요즘 한국에도 레게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히피스타일의 젊은이들이 급격
히 늘어가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보고 있다. 한국과 멕시코의 젊은이들은
햄버거와 피자를 즐겨먹는다. 지난 88년 대선당시 석연치않은 개표과정을
통하여 떨어졌던 중도좌파 민주혁명당의 카르데나스 후보는 이번 94년 선
거에서 다시 출마하여 보수적인 투표성향속에 88년보다도 더낮은 지지를
획득했다. 그는 87년과 92년 두번 고배를 마신 김대중씨를 연상시킨다.
94년 김철수 상공장관이 WTO 사무총장에 출마하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
었는데 멕시코의 살리나스 또한 국제화 세계화의 기수인양 WTO사무총장
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미국의 지지의사까지 확보했었다.
산업분야로 보면 한국에서 한창 제2이동통신의 시설재를 국산으로 할 것인
가 아니면 AT&T등 미국통신회사의 거의 반값밖에 안되는 시설을 들여올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듯이 멕시코에서도 90년 민영화된
텔멕스의 통신사업을 둘러싸고 AT&T와 벨사의 광케이블 장거리 통신사업
장악을 위한 저가공세와 기술제휴가 한창이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우리와 너무도 닮은 멕시코의 현재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만약 우리들이 멕시코의 페소화 하락으로 빚어진 현하의 상황을 단순히 얼
마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손익계산이나 국제 환율변동
과 증시하락으로 인하여 초래될 경제의 중기적 침체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멕시코보다 더 늦게 그러나 더심각한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
다. 지금이라도 거품같은 세계화의 꿈에서 깨어나 노동자 농민과 함께 나
누는 민족자립경제의 진로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 오차드로드 임대료, 외환위기 전 수준까지 근접







2007-07-02 10:31 홍은희기자 jane_hong@rootiz.com

오차드 로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쇼핑몰들의 임대료가 아시아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 중이라고 씨비리차드엘리스가 최근 발표했다.



4월부터 6월까지 싱가포르의 핵심 쇼핑 지역의 상점 임대료가 평방피트당 34,40 싱가폴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싱가포르 부동산 시장이 최고 정점이었던 1996년 당시 임대료의 98% 수준이다. 1996년 오차드 로드의 상점 임대료는 월 평균 평방피트당 35.10 싱가포르 달러였다. Singapore Orchard Road
오차드 로드 지역의 상점들이 최근 새롭게 리노베이션하거나 재건되면서 이 지역 임대료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   



정부가 주도하는 도심재생 프로그램에 의해 빌딩 개발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쇼핑 지역을 따라 상점이나 빌딩들이 새로 단장하는 움직임 역시 활발하다. 



싱가포르 경제의 강한 성장세와 전세계적인 유명 브랜드의 잇따른 싱가포르 진출에 힘입어 싱가포르 상점 분야에 대한 투자가들의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CBRE 리테일 부서 소속 관계자는 올해 2분기 유럽 소재의 신규 브랜드들이 싱가포르에 상당히 많이 상륙했다며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과 호주 브랜드들이 앞다퉈 싱가포르에 상점을 오픈하고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현지 소매상인들도 리브랜딩하느라 여념이 없다. 실례로 로빈슨은 패션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오차드 로드의 상점 임대료는 올 해에 걸쳐 10년 내 가장 높은 수준인 4~7%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즉 연말이면 이 지역의 임대료는 1996년 당시의 임대료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상점 및 몰들의 임대료 상승은 오차드 로드만의 얘기는 아니다. 시티홀과 마이란 센터 벨트 및 다른 주요 쇼핑 지역들의 임대료도 오차드로드의 영향을 받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래이플즈 시티와 선택 시티 등 새롭게 단장한 몰들의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핵심 지역의 임대료를 끌어올리고 있다.



래이플즈 시티와 선택시티의 임대료는 1년전보다 4.4% 인상되면서 평방피트당 월 임대료가 25.90 싱가폴 달러를 기록중이다.

 

 

그린스펀 "현 사태, LTCM 등 과거 금융위기와 유사"
1837년·1907년·1987년·1998년 금융위기에 비견 가능
버블 제거위해 금리조절 반대.."인간은 거품에 못 이긴다"
입력 : 2007.09.07 13:48

[이데일리 하정민기자]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전 의장이 현재의 신용 위기가 지난 1987년 주가 대폭락이 일어났던 `블랙 먼데이`, 1998년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 파산 등 과거 네 차례 대형 금융위기와 유사하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그린스펀 의장은 거품을 제거하기 위해 금리를 조절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인류가 절대 거품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내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7일 그린스펀 전 의장이 전일 워싱턴에서 학술지 `브루킹스 페이퍼스`가 주최한 행사에서 참석 이코노미스트들을 대상으로 이같은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


그린스펀 의장은 "지난 7주 동안 일어났던 금융시장의 행동들이 여러 측면에서 지난 1998년 LTCM 파산과 1987년 블랙 먼데이와 매우 유사하다(identical)"고 말했다.

이어 지난 1837년 미국 부동산 버블 붕괴와 1907년 미국 은행업 위기와도 비슷한 측면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똑같은 요인들이 경기 확장과 경기 둔화를 가져온다고 이코노미스트들이 생각하지만 경기 확장기는 매우 다르다"며 "현재는 `도취`보다 `두려움`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 본성 상 도취는 경기가 수 년 간 확장세를 이어갈 때 나타나고 거품으로 이어진다"며 "이 거품들은 열병(금융위기)으로 비화하기 전까지는 제거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린스펀은 "거품은 금리 조정으로 제거할 수 없다"며 "1994~1995년 주식시장 버블 당시 금리를 두 배로 올려 주식시장 활황을 멈추게 했지만 금리인상을 중단하자 주가는 다시 급락했다"며 "1997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류는 절대로 거품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 500년의 국가대표급 버블..지금은 金? 부동산 버블후 인류는 3차 金 버블기 진입
CNN머니, 반복되는 버블붕괴의 역사
입력 : 2010.01.08 10:11

[이데일리 오상용기자] 역사는 반복된다. 자산시장도 마찬가지다. 성숙에 성숙을 거듭해 가는 듯 보이다가도 탐욕과 자산버블, 곧 뒤따르는 버블 붕괴라는 순환을 되풀이한다.

미국의 경제전문채널 CNN머니는 과거 500년을 수놓았던 국가대표급 버블 13가지를 소개했다. 유럽의 튤립 투기에서 시작된 자산버블의 역사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CNN머니는 가장 최근 형성되고 있는 버블은 `3차 골드 러시`라 불리는 금(金) 투기라고 했다.

1634~1638년 튤립











▲ 튤립버블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는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버블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네덜란드의 내로라 하는 부자들은 튤립 구근을 사기 위해 목을 맸다. 그러나 집 한채 값과 맞먹던 튤립 가격은 하루밤 새 곤두박질 쳤고 네덜란드 경제는 파탄에 빠지고 만다.

1720년 사우스시(South Sea) 버블

사우스시는 해외무역권을 독점한 영국의 무역회사였다. 사람들은 이 회사가 별로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연한 기대감 하나로 주식 매수에 뛰어든다. 정확한 기업 분석없이 진행된 맹목적인 투자는 대규모 손실로 마무리됐다. 투자수익은 현실화되지 못했고 사우스시의 경영진은 줄줄이 철창신세를 졌다.

1848년 1차 골드러시(Gold Rush)

미국 서부개척시대는 황금과 함께 한다. 수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좇아 캘리포니아 북부의 금광으로 몰려갔다. 1만5000명에 불과하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1854년에는 30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미국 대륙을 집어삼킬 듯한 광풍이었지만 정작 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1860년~1873년 철도회사

남북전쟁 직후 미국 전역에는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과 북,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철로가 생겨났다. 당시 뉴욕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에서 철도회사 주식이 차지한 비중만 40%에 달했다. 그러나 1873년 적지않은 노선에서 적자가 발생해 십수개의 철도회사가 파산에 이르자 주식시장은 공황에 빠지고 만다.

1890년대 자전거 열풍

한때 자전거 산업은 미국내 가장 성업했던 산업이다. 300개에 달했던 자전거 회사는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는다. 자전거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던 자본가들에게 빚더미만 남긴채. 1905년 자전거 제조업체는 12개만 남게 된다.

1920년대 라디오 주식 광풍











▲ 라디오 버블
버블의 동인에는 기술혁명이 자리한다. 라디오시대라 일컬어지던 1920년대 라디오 회사들의 주가는 1990년대말 닷컴 버블에 맞먹는다. 최대 라디오 회사였던 라디오 코프 오브 아메리카(RCA)의 주가는 1921년 1달러에서 1929년 573달러까지 올랐다. 이후 RCA주가는 폭락을 거듭 95% 떨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1959년 일렉트로닉스의 시대

우주 시대의 여명기였던 이 무렵 주식시장의 테마는 전기전자 업체를 의미하는 `-트론`이었다. 아스트론과 트랜지스트론 등이 대표적 기업. 이들의 주가는 아폴로 11호처럼 달까지 치솟는 듯했지만 굉음과 함께 지표면에 추락하고 만다.

1974년~1980년 2차 골드러시

1·2차 석유파동이 불러온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컸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던 시절, 마침 미국에선 대공항 이후 처음으로 가계의 금투자가 허용된다. 1974년 온스당 100달러에 불과했던 금값은 1980년에는 850달러까지 무려 8.5배나 치솟았다. 이후 금 투자자를 기다린 것은 25년간의 내리막 곡선이었다.

1980~1984년 개인컴퓨터(PC)의 시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애플의 맥과 같은 PC 운영체계(O/S)가 선보이기도 전인 1980년대 초반 개인용컴퓨터(PC) 제조회사는 스타였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사랑을 받던 PC업체의 주가는 1984년 들어 반토막이 나며 애물단지로 전략한다.

1985~1990년 일본의 자산버블

일본인들에게 이 시절은 뭐든 사 놓으면 가격이 오르던 시기다. 주식과 부동산이 대표적 투자처였다. 1985년에서 1989년 사이 일본 주식들은 평균 4배가 올랐다. 그러나 뒤 따른 것은 1990년의 주가 대폭락과 부동산 시장의 붕괴다. 잃어버린 10년의 클라이맥스였다.

1997~2000년 닷컴버블

고대 마법사의 부활을 보는 듯 했다. 닷컴(.Com)은 가장 영엄한 주술임에 틀림없었다. 닷컴을 붙이기만 하면 뭐든 돈이 됐다. 그러나 파티는 4년만에 막을 내렸다. 2000년 닷컴버블의 붕괴로 꼭지점에서 닷컴주를 샀던 투자자들은 평균 80%의 손실을 입었다.











▲ 부동산 버블
2003~2007년 부동산 광풍


넘쳐났던 유동성은 빚을 내 집을 샀던 집주인들에게 달콤한 첫맛과 지옥같은 끝맛을 남겼다. 돈을 빌려줬던 은행도 마찬가지다. 오를 것만 같던 집값은 2006년을 정점으로 내리막 곡선을 탔고 부동산 버블 붕괴는 미국발 금융쇼크와 전지구적인 경기후퇴를 낳았다.

2008년~현재 3차 골드러시

지금 우리는 다시 3차 골드러시 시대로 접어들었다. 금값은 온스당 1100달러를 넘어서며 거품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다가올 인플레이션 시대를 감안하면 금값은 더 오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금이 버블의 막차를 탔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엔론社의 회계부정

 

*엔론은 닷컴 기업이 아닙니다만 몰락의 원인은 닷컴 기업들과 흡사합니다.

엔론은 1985년 휴스턴 내추럴 가스(Houston Natural Gas)와 인터노스(InterNorth) 사의 합병으로 탄생한 천연 가스 공급 회사였습니다. 이후 엔론은 석유, 전기, 펄프, 플라스틱, 금속, 금융, 고속 인터넷 등의 분야로 진출하면서 미국 최대 규모의 에너지 자원 및 원자재 판매 회사로 성장합니다.

엔론의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생산한 에너지 자원과 원자재를 판매하는 회사 자산 사업, 다른 하나는 제3의 기업들이 생산한 자원과 자재를 고객 기업에게 공급해주는 중개 사업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엔론은 중개 사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엔 엔론온라인(EnronOnline)을 설립, 인터넷으로 중개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엔론의 혁신, 그리고 빛나던 명성

엔론온라인은 수많은 에너지 생산/배송업체와 (인터넷과 엔론 소유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긴밀한 네트웍을 형성해, 고객 주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엔론 웹사이트에서 2달 간의 천연 가스를 주문하면, 엔론은 그 고객 기업에게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가스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 배송업체를 찾아 연결시켜 주는 식이었죠.

엔론은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 모든 제품의 가격이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과거 에너지 자원의 가격이 공개되지 못했던 시기에 엔론은 가격에 대한 정보를 독점해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 바뀐 뒤로, 엔론은 자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방적으로 전환해 가격이 공개된 환경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웹에서 중개 사업을 시작한 엔론은 수요와 공급을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맞춰줄 수 있었습니다. 과거 1980년대에 장기간의 가스 공급 계약을 맺기 위해선 수많은 업체들과 접촉, 회의, 계약 수정 등의 과정을 거치며 9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힘을 이용한 뒤로, 엔론은 같은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단 수 초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전체 거래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엔론의 온라인 거래는 급증했으며, 회사는 그 과정에서 막대한 중개 수수료를 받아 이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1998년 310억 달러였던 수익 규모가 2000년에는 1010억 달러를 기록한 엔론은 포춘 500대 기업 중 (매출액 기준) 7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같은 기간 포춘 선정 ‘가장 혁신적인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죠.

엔론은 자사의 웹사이트에 기반한 비즈니스 모델을 ‘마켓 운영체계(Market Operating System: MOS)’라고 부르며 초고속 인터넷, 금융 사업 등 다양한 분야로 적용합니다. 이로써 엔론은 ‘인터넷 시대의 시장 개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죠.

이처럼 엔론은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B2B 전자 상거래 기업으로 명성을 얻으며 ‘e비즈니스의 모범 사례’로까지 기록됩니다.

 

빛나는 명성 뒤에 감춰진 엄청난 부정

그러나 이런 엔론의 화려한 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엔론은 사실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부실 기업이었습니다.

엔론의 부실은 2001년 10월 3/4분기 수익 발표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이때 엔론은 초고속 인터넷, 수도 등의 사업에서 10억 달러를 손해 봤으며, 파트너 기업과의 계약 문제로 12억 달러의 자산이 축소됐다고 발표합니다. (이후 이 ‘파트너 기업’은 엔론의 회계 조작을 위한 조직체였음이 드러납니다.)

곧 이어 엔론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수익을 거의 6억 달러씩 (이는 엔론의 전체 수익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음) 부풀려 보고했다고 자백합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엔론의 (90달러 선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순식간에 추락했고, 신용등급 역시 최하 단계로 떨어집니다.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 엔론은 2001년 12월 파산하고 맙니다. 이때 파산한 엔론의 자산 규모는 498억 달러, 총부채 312억 달러였고,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산으로 기록되죠.

엔론의 몰락은 회사 부실의 은폐, 조작에서 비롯됐습니다. 엔론은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을 청산하고 내실을 다지기 보다는, 오히려 부실을 감추고 주식 가치를 높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인터넷 시장 환경에서 개방된 비즈니스 모델로 이름을 날렸던 엔론은 사실 그 어떤 기업보다 불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악화된 수익 구조를 감추기 위해 엔론은 회계 장부를 조작해 회사의 실적을 부풀리고 부채 관련 사항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나중엔 실적 조작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외부에 독립된 조직체들을 만들어 수익과 손실을 바꿔 치는 등 파행/편법 운영을 거듭했습니다. 실제로, 2000년 한해동안 엔론이 기록한 주당 순이익(earning per share: EPS) 중 28%는 외부 조직체에 자산을 팔아 올린 부당 수익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엔론온라인 설립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중개 사업 수익률 역시 이런 식으로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엔론의 자랑이었던 인터넷 중개 사업은 사실 큰 수익을 내고 있지 못했습니다. 인터넷 중개 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었고, 치열해진 경쟁 상황에서 마진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죠. 1998년 5.3%에 달했던 엔론의 중개 마진율은 일년도 안 되는 새에 1%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수익률을 극복하기 위해 엔론은 초고속 인터넷, 금속, 금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고, 이는 오히려 회사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죠.

 

e비즈니스에 대한 환상

엔론이 보여준 웹 비즈니스 사례는 분명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엔론은 이러한 혁신마저도 회사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인터넷 중개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꾸민 엔론은 회사를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유능한 기업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대 포장 속에서 조직은 몰락했고, 엔론의 혁신은 아무런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엔론을 인수하려다 포기한 다이너지(Dynergy)의 사장, 처크 왓슨(Chuck Watson)은 엔론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엔론은 투자 등급이 BBB에 불과한, 자금 사정도 좋지 못한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이 전세계적인 온라인 중개상, 인터넷의 힘을 이용한 시장 개척자로 탈바꿈하며 e비즈니스의 선두 주자가 된다고 하자, 모든 시장이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