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오상용기자] 역사는 반복된다. 자산시장도 마찬가지다. 성숙에 성숙을 거듭해 가는 듯 보이다가도 탐욕과 자산
버블, 곧 뒤따르는 버블 붕괴라는 순환을 되풀이한다.
미국의 경제전문채널 CNN머니는 과거 500년을 수놓았던 국가대표급 버블 13가지를 소개했다. 유럽의 튤립 투기에서 시작된 자산버블의 역사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CNN머니는 가장 최근 형성되고 있는 버블은 `3차 골드 러시`라 불리는 금(金) 투기라고 했다.
1634~1638년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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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튤립버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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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는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버블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네덜란드의 내로라 하는 부자들은 튤립 구근을 사기 위해 목을 맸다. 그러나 집 한채 값과 맞먹던 튤립 가격은 하루밤 새 곤두박질 쳤고 네덜란드 경제는 파탄에 빠지고 만다.
1720년 사우스시(South Sea) 버블 사우스시는 해외무역권을 독점한 영국의 무역회사였다. 사람들은 이 회사가 별로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연한 기대감 하나로 주식 매수에 뛰어든다. 정확한 기업 분석없이 진행된 맹목적인 투자는 대규모 손실로 마무리됐다. 투자수익은 현실화되지 못했고 사우스시의 경영진은 줄줄이 철창신세를 졌다.
1848년 1차 골드러시(Gold Rush) 미국 서부개척시대는 황금과 함께 한다. 수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을 좇아 캘리포니아 북부의 금광으로 몰려갔다. 1만5000명에 불과하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1854년에는 30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미국 대륙을 집어삼킬 듯한 광풍이었지만 정작 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
1860년~1873년 철도회사 남북전쟁 직후 미국 전역에는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과 북,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철로가 생겨났다. 당시 뉴욕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에서 철도회사 주식이 차지한 비중만 40%에 달했다. 그러나 1873년 적지않은 노선에서 적자가 발생해 십수개의 철도회사가
파산에 이르자
주식시장은 공황에 빠지고 만다.
1890년대 자전거 열풍 한때 자전거 산업은 미국내 가장 성업했던 산업이다. 300개에 달했던 자전거 회사는 자동차의 등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는다. 자전거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던 자본가들에게 빚더미만 남긴채. 1905년 자전거 제조업체는 12개만 남게 된다.
1920년대 라디오 주식 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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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버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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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의 동인에는 기술혁명이 자리한다. 라디오시대라 일컬어지던 1920년대 라디오 회사들의 주가는 1990년대말 닷컴 버블에 맞먹는다. 최대 라디오 회사였던 라디오 코프 오브 아메리카(RCA)의 주가는 1921년 1달러에서 1929년 573달러까지 올랐다. 이후 RCA주가는 폭락을 거듭 95% 떨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1959년 일렉트로닉스의 시대 우주 시대의 여명기였던 이 무렵 주식시장의 테마는 전기
전자 업체를 의미하는 `-트론`이었다. 아스트론과 트랜지스트론 등이 대표적 기업. 이들의 주가는 아폴로 11호처럼 달까지 치솟는 듯했지만 굉음과 함께 지표면에 추락하고 만다.
1974년~1980년 2차 골드러시 1·2차 석유파동이 불러온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컸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던 시절, 마침 미국에선 대공항 이후 처음으로 가계의 금투자가 허용된다. 1974년 온스당 100달러에 불과했던 금값은 1980년에는 850달러까지 무려 8.5배나 치솟았다. 이후 금 투자자를 기다린 것은 25년간의 내리막 곡선이었다.
1980~1984년 개인컴퓨터(PC)의 시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애플의 맥과 같은 PC 운영체계(O/S)가 선보이기도 전인 1980년대 초반 개인용컴퓨터(PC) 제조회사는 스타였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사랑을 받던 PC업체의 주가는 1984년 들어 반토막이 나며 애물단지로 전략한다.
1985~1990년 일본의 자산버블 일본인들에게 이 시절은 뭐든 사 놓으면 가격이 오르던 시기다. 주식과
부동산이 대표적 투자처였다. 1985년에서 1989년 사이 일본 주식들은 평균 4배가 올랐다. 그러나 뒤 따른 것은 1990년의 주가 대폭락과 부동산 시장의 붕괴다. 잃어버린 10년의 클라이맥스였다.
1997~2000년 닷컴버블 고대 마법사의 부활을 보는 듯 했다. 닷컴(.Com)은 가장 영엄한 주술임에 틀림없었다. 닷컴을 붙이기만 하면 뭐든 돈이 됐다. 그러나 파티는 4년만에 막을 내렸다. 2000년 닷컴버블의 붕괴로 꼭지점에서 닷컴주를 샀던 투자자들은 평균 80%의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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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 버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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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7년 부동산 광풍 넘쳐났던 유동성은 빚을 내 집을 샀던 집주인들에게 달콤한 첫맛과 지옥같은 끝맛을 남겼다. 돈을 빌려줬던 은행도 마찬가지다. 오를 것만 같던 집값은 2006년을 정점으로 내리막 곡선을 탔고 부동산 버블 붕괴는 미국발
금융쇼크와 전지구적인 경기후퇴를 낳았다.
2008년~현재 3차 골드러시 지금 우리는 다시 3차 골드러시 시대로 접어들었다. 금값은 온스당 1100달러를 넘어서며 거품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다가올 인플레이션 시대를 감안하면 금값은 더 오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금이 버블의 막차를 탔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엔론社의 회계부정
*엔론은 닷컴 기업이 아닙니다만 몰락의 원인은 닷컴 기업들과 흡사합니다.
엔론은 1985년 휴스턴 내추럴 가스(Houston Natural Gas)와 인터노스(InterNorth) 사의 합병으로 탄생한 천연 가스 공급 회사였습니다. 이후 엔론은 석유, 전기, 펄프, 플라스틱, 금속, 금융, 고속 인터넷 등의 분야로 진출하면서 미국 최대 규모의 에너지 자원 및 원자재 판매 회사로 성장합니다.
엔론의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생산한 에너지 자원과 원자재를 판매하는 회사 자산 사업, 다른 하나는 제3의 기업들이 생산한 자원과 자재를 고객 기업에게 공급해주는 중개 사업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엔론은 중개 사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엔 엔론온라인(EnronOnline)을 설립, 인터넷으로 중개 사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합니다.
엔론의 혁신, 그리고 빛나던 명성
엔론온라인은 수많은 에너지 생산/배송업체와 (인터넷과 엔론 소유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긴밀한 네트웍을 형성해, 고객 주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엔론 웹사이트에서 2달 간의 천연 가스를 주문하면, 엔론은 그 고객 기업에게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가스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 배송업체를 찾아 연결시켜 주는 식이었죠.
엔론은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 모든 제품의 가격이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과거 에너지 자원의 가격이 공개되지 못했던 시기에 엔론은 가격에 대한 정보를 독점해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 바뀐 뒤로, 엔론은 자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방적으로 전환해 가격이 공개된 환경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웹에서 중개 사업을 시작한 엔론은 수요와 공급을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맞춰줄 수 있었습니다. 과거 1980년대에 장기간의 가스 공급 계약을 맺기 위해선 수많은 업체들과 접촉, 회의, 계약 수정 등의 과정을 거치며 9개월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의 힘을 이용한 뒤로, 엔론은 같은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단 수 초 만에 처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전체 거래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엔론의 온라인 거래는 급증했으며, 회사는 그 과정에서 막대한 중개 수수료를 받아 이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1998년 310억 달러였던 수익 규모가 2000년에는 1010억 달러를 기록한 엔론은 포춘 500대 기업 중 (매출액 기준) 7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같은 기간 포춘 선정 ‘가장 혁신적인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죠.
엔론은 자사의 웹사이트에 기반한 비즈니스 모델을 ‘마켓 운영체계(Market Operating System: MOS)’라고 부르며 초고속 인터넷, 금융 사업 등 다양한 분야로 적용합니다. 이로써 엔론은 ‘인터넷 시대의 시장 개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죠.
이처럼 엔론은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B2B 전자 상거래 기업으로 명성을 얻으며 ‘e비즈니스의 모범 사례’로까지 기록됩니다.
빛나는 명성 뒤에 감춰진 엄청난 부정
그러나 이런 엔론의 화려한 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엔론은 사실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부실 기업이었습니다.
엔론의 부실은 2001년 10월 3/4분기 수익 발표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이때 엔론은 초고속 인터넷, 수도 등의 사업에서 10억 달러를 손해 봤으며, 파트너 기업과의 계약 문제로 12억 달러의 자산이 축소됐다고 발표합니다. (이후 이 ‘파트너 기업’은 엔론의 회계 조작을 위한 조직체였음이 드러납니다.)
곧 이어 엔론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수익을 거의 6억 달러씩 (이는 엔론의 전체 수익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음) 부풀려 보고했다고 자백합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엔론의 (90달러 선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순식간에 추락했고, 신용등급 역시 최하 단계로 떨어집니다.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 엔론은 2001년 12월 파산하고 맙니다. 이때 파산한 엔론의 자산 규모는 498억 달러, 총부채 312억 달러였고,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산으로 기록되죠.
엔론의 몰락은 회사 부실의 은폐, 조작에서 비롯됐습니다. 엔론은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을 청산하고 내실을 다지기 보다는, 오히려 부실을 감추고 주식 가치를 높이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인터넷 시장 환경에서 개방된 비즈니스 모델로 이름을 날렸던 엔론은 사실 그 어떤 기업보다 불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악화된 수익 구조를 감추기 위해 엔론은 회계 장부를 조작해 회사의 실적을 부풀리고 부채 관련 사항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나중엔 실적 조작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외부에 독립된 조직체들을 만들어 수익과 손실을 바꿔 치는 등 파행/편법 운영을 거듭했습니다. 실제로, 2000년 한해동안 엔론이 기록한 주당 순이익(earning per share: EPS) 중 28%는 외부 조직체에 자산을 팔아 올린 부당 수익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엔론온라인 설립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중개 사업 수익률 역시 이런 식으로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엔론의 자랑이었던 인터넷 중개 사업은 사실 큰 수익을 내고 있지 못했습니다. 인터넷 중개 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었고, 치열해진 경쟁 상황에서 마진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죠. 1998년 5.3%에 달했던 엔론의 중개 마진율은 일년도 안 되는 새에 1%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수익률을 극복하기 위해 엔론은 초고속 인터넷, 금속, 금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고, 이는 오히려 회사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죠.
e비즈니스에 대한 환상
엔론이 보여준 웹 비즈니스 사례는 분명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엔론은 이러한 혁신마저도 회사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인터넷 중개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꾸민 엔론은 회사를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유능한 기업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대 포장 속에서 조직은 몰락했고, 엔론의 혁신은 아무런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엔론을 인수하려다 포기한 다이너지(Dynergy)의 사장, 처크 왓슨(Chuck Watson)은 엔론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엔론은 투자 등급이 BBB에 불과한, 자금 사정도 좋지 못한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이 전세계적인 온라인 중개상, 인터넷의 힘을 이용한 시장 개척자로 탈바꿈하며 e비즈니스의 선두 주자가 된다고 하자, 모든 시장이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