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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지방의 전국 대명들과 그 역사

태초 여행사 2010. 2. 15. 11:03

 

 

규슈(九州) 삼국사

 1. 규슈 삼국의 시초


가마쿠라 시대부터 전국 시대까지의 규슈는 서로 대립하는 세 개의 세력들이 끊임없이 견제하는 상태로 전개되고 있었 다.

 

일의 발단은, 가마쿠라 막부가 각 国(구니)에 대한 守護(슈고) 설치의 일환으로 豊前(부젠)·筑前(치쿠젠)·肥前(히젠)의 北九州(기타규슈) 삼국의 슈고에 武藤資頼(무토 스케요리)를, 豊後(분고)·筑後(치쿠고)·肥後(히고)의 中九州(나카규슈) 삼국의 슈고에 中原親能(나카하라 치카요시 : 大友能直(오토모 요시나오))를, 薩摩(사쓰마)·大隅(오스미)·日向(휴가)의 南九州(미나미규슈) 삼국에 島津忠久(시마즈 다다히사)를 임명했던 것에서 시작한다.


그 중에서 무토씨는 鎮西守護(진서 슈고)가 되었고, 그와 함께 大宰少弐(다자이 쇼니)에 임명되어 쇼니씨를 칭하였다. 결국 시마즈·오토모·쇼니의 세 가문이 서로 견제하여 고착하게 되었다.

 

남북조기에는 세 개의 파벌로 분열하여 복잡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 후에 探題(탄다이) 今川了俊(이마가와 로슌)의 교묘한 조정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로슌이 교토로 복귀한 후에,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여 규슈는 이른바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시마즈·오오토모·쇼니의 대립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3세력의 견제 체제에 기타규슈를 둘러싸고, 한때에는 中国(쥬코쿠)의 大内氏(오우치씨)가 가세하였지만, 그 후에 오우치씨는 陶氏(스에씨)에게, 스에씨는 毛利氏(모리씨)에게 멸망하였다.


이러한 하극상의 풍조는 규슈에서도 나타난다. 히젠에서는 쇼니씨 휘하의 龍造寺氏(류조지씨)가 주가를 누르고 센고쿠 다이묘로서 대두했다.


여기에 이르러, 규슈는 센고쿠 다이묘였던 류조지·오토모·시마즈 3씨가 정립하게 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2. 규슈의 센고쿠 다이묘


규슈는 織豊(쇼쿠호) 정권을 낳은 畿内(기나이)와 그 인접국들과는 달리, 名主(묘슈)는 小地頭(오지토)로서 백성들을 지배하였고, 동국(東国)으로부터 파견된 惣地頭(소우지토)와 함께, 일찍부터 영주화하여 재지 영주(在地領主)로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규슈는 장원 영주의 직접 지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시마즈·오토모·쇼니씨와 같은 가마쿠라 이래의 슈고 가문이 토착화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쇼니씨를 제외하고는 슈고로서 봉건 영주가 되었고, 다시 센고쿠 다이묘로의 발전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규슈는 묘슈의 무사화·가신단화를 강하게 추진하여, 이른바 하극상에 의해 센고쿠 다이묘가 된 기나이와 그 인접국들과는 달리, 가마쿠라 이래의 낡은 전통을 지키고 있었던 슈고가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규슈 센고쿠 다이묘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오토모씨의 경우


오토모씨는 분고 지방에 토착하였고, 초대 能直(요시나오), 2대 親秀(치카히데)의 대에 一万田(이치마다)·志賀(시가)·田原(타하라)·戸次(토츠기) 등의 일족 가문들을 배출하였고, 여기에서 오토모 일족 가문들이 성립했다.


남북조의 내란 이후에 오토모 종가는, 일족 가문들 중에서 본가에 충실하였던 유력한 서가(庶家)에 의지하면서, 가신단의 강화와 견명 무역(遣明貿易)으로부터 파급되는 경제력 등에 의해, 교묘하게 슈고영국체제(守護領国体制)를 전개했다.

 

9대 氏継(우지쓰구) 이후, 아우 親世系(치카요 계보) 간에 혈통이 왔다갔다하지만, 義長(요시나가)의 무렵이 되면서 장자 단독 상속제가 확립되었고, 오토모 종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게다가 요시나가의 시대에는 서가나 후다이직신(譜代直臣 : 동문중(同紋衆)) 외에, 다른 성의 사람들인 재지 영주들의 가신단화가 추진되었다. 義鑑(요시아키)의 시대가 되면, 오토모 일족 60가(家)·타성의 일족 100가(家)의 오토모 가신단이 성립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하였다.

 

義鎮(요시시게)의 시대가 되면, 分国(분고쿠)의 확대가 급속히 진행되었고, 일시 오토모씨는 부젠·분고 외에 치쿠젠·치쿠고·히젠·히고의 6개국을 판도에 넣었다. 이러한 분고쿠의 확대에 수반하여, 토츠기씨의 치쿠젠 立花(다치바나) 이동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문중을 현지에 파견하여 정복지를 장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치바나 이봉 후의 토츠기씨는 오토모씨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점차 독자적인 분권 권력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다져 나갔다.

 

오토모씨는 가신단의 편성에서, 재지 영주의 지역적인 결합 단위인 一揆(잇키)나 슈중(衆中)을 지배의 기반으로 하여, 유력 가신에 대해서는 영지에 대한 검단불입(検断不入)의 원칙을 인정하거나 부역 면제의 특권을 주는 등, 분고쿠에 대한 토지 소유권의 장악은 강하지 못했다.


 

● 류조지씨의 경우                                                                       

 

쇼니씨를 누르고 대두한 히젠의 류조지씨는, 水ケ江(미즈가에) 류조지계의 隆信(다카노부)가 본가인 村中(무라나카)류조지가를 상속하였는데, 기타규슈의 패권을 둘러싼 오우치&모리씨와 오토모씨의 대립을 이용하여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특히, 1570년에 오토모씨의 대군을 佐賀(사가)에서 격파한 다카노부는, 우선 오토모씨의 세력권에서 가장 가까운 동부 히젠을 평정하였고, 그 다음에 오토모씨의 잔당이 많은 북부 히젠을 수중에 넣었고, 서부·남부 히젠에까지 진출하여, 1578년까지 히젠 제패를 완료하였다.

                              

또한 인접국들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여, 1580년까지 치쿠고 일국 외에 히고·치쿠젠의 절반 및 부젠 3군을 정복하였다. 今山(이마야마) 전투 이래로 불과 10년만에, 이른바 「5주의 오모리(五州の大守)」로 발전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류조지·오토모·시마즈의 3씨 정립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류조지씨의 정복지에 대한 지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가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히젠 8군(八郡)은 유력한 재지 영주와의 양자 결연 정책이나 류조지·鍋島(나베시마) 일족의 요지 배치를 통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수립하였다.


多良山脈(타라 산맥) 이서·이남의 히젠 3군은 松浦(마츠우라)·大村(오무라)·有馬氏(아리마씨) 등의 센고쿠 다이묘들에게 서약문을 쓰게 하거나 인질을 보내게 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에, 그 지배력은 극히 취약하였다.

 

특히 히젠 이외의 분고쿠에서는 류조지씨의 휘하에 속한 재지 영주의 배반, 가신화가 반복되어 극히 불안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쓰마·오스미·휴가의 산슈를 통일한 시마즈씨의 북상과 함께 한층 더 현저해졌다.



● 시마즈씨의 경우


시마즈씨 대두의 기반이 된 미나미규슈는 원격지형(遠隔地型)의 장원 체제하의 독자적인 재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재지 영주 힘이 강했고, 소지토와 소우지토의 내분도 격렬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마즈씨의 슈고영국제의 전개를 한층 더 곤란하게 했던 것이 시마즈 일족의 내홍(内訌)이었다.


 

시마즈씨는 초대 다다히사~다다쿠니까지의 시기에 若狭(와카사)·越前(에치젠)·伊作(이사쿠)·総州(소슈)·奥州(오우슈)·薩州(삿슈)·豊州(호슈)·相州(상슈)의 각각의 시마즈가 외에 山田(야마다)·町田(마치다)·伊集院(이쥬인)·新納(니이로)·樺山(카바야마)·北郷(혼고)·川上氏(가와카미씨) 등의 일족 서가(一族庶家)를 배출하였다.                                                                                 

 

이 중에서 소슈 시마즈씨와 오슈 시마즈씨와의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아시카가 막부는 1404년에 양자를 화해시켰고, 元久(모토히사)에게 휴가와 오스미, 나중에 사쓰마의 슈고직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모토히사가 사망하면서, 이번에는 모토히사의 아우 久豊(히사토요)와 伊集院頼久(이쥬인 요리히사)와의 사이에 불화가 생겨 양자는 도처에서 싸움을 벌였고, 일진일퇴의 후에 히사토요는 요리히사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시마즈 일족의 내홍은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여기에 국내의 세력인 재지 영주와의 알력이 더해져, 산슈는 대립과 분열을 반복하였다. 특히, 忠治(다다하루)·忠隆(다다다카)·勝久(가쓰히사)의 시기에는 모두 유약하여, 슈고가의 권위가 추락하였고, 시마즈씨는 겨울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시마즈 본가를 재흥하여 산슈의 통일에 성공했던 것이 島津貴久(시마즈 다카히사)이다. 다카히사는 1526년에 슈고가를 이었고, 일족의 내홍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4명의 출중한 아들들의 협력에 의해, 시마즈씨 웅비의 기반을 만들었다.


우선 사쓰마·오스미를 안정시키고, 菱刈(릉예)·渋谷(시부야)·肝付(키모츠키) 등의 유력한 재지 영주를 제압하였다. 한편, 휴가는 豊州(호슈) 島津忠親(시마즈 다다치카)의 협력을 얻어 판도에 넣었고, 산슈의 통일에 성공하였다.  


시마즈씨는 이 과정을 통해서, 군소의 재지 영주를 가신단에 편성하면서, 토죠제(外城制)라고 하는 독특한 재지 지배의 방법을 이용하여 토죠 지배하의 슈중(衆中)에는 시마즈씨의 직신단(直臣団)을 배치하였고, 성하(城下)의 산기슭에 거주시켜, 토죠의 군사력을 구성함과 아울러 농촌 지배도 담당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마즈씨는 강력한 재지 지배의 체제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센고쿠 다이묘 권력을 만들어냈다. 거기에서 오토모씨나 류조지씨와의 권력 구조의 차이를 찾아볼 수가 있다.

 


3. 삼국체제의 붕괴


산슈를 통일한 시마즈씨는 분고에서 남하해 온 오토모씨와 대립했지만, 1578년에 이것을 휴가의 미미가와에서 격파하여, 오토모씨는 수세에 처하였다. 류조지 다카노부의 치쿠고 공략은 이 틈을 타서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류조지와 시마즈 양자의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시마즈씨는 휴가에서 히고로 진출했지만, 류조지씨는 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이하의 주력을 히고에 파견하는 한편, 치쿠젠에 진출하여 서남 9군을 영유하였다. 더욱이 龍造寺信周(류조지 노부치카)를 부젠에 파견하여 북 3군을 평정하였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시마즈씨에게 대항했던 것이다.


치쿠고의 재지 영주 류조지씨에 대한 배반은 이 때부터 현저해졌다. 1580~1581년의 蒲池鎮並(카바이케씨), 1582년의 田尻鑑種(타지리 아키타네)의 배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1584년 3월에 류조지·시마즈 두 가문은 전면적으로 대립하였다. 다카노부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군을 인솔하여 高来(다카키)에 남하하였고, 전장에서도 나오시게의 전술을 갑자기 변경하여 스스로 중앙 돌파를 시도하였기 때문에, 시마바라에서 전사하였다.

 

다카노부의 전사에 의해 규슈의 판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류조지·오토모·시마즈 3씨의 균형 관계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류조지씨는 다카노부의 적자 政家(마사이에)가 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보좌에 의해, 옛 영토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오시게는 다카노부의 사후에 활발해진 오토모씨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치쿠고의 방위를 굳혔다.


그런데, 오토모군의 강력한 반격이 있기 전에 치쿠고의 무사들은 대부분 오토모씨에게 항복하였다. 당시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산슈의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치쿠고에 침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류조지·오토모·시마즈 3씨의 마지막 공방전은 치쿠고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585년에 우선 오토모씨가 류조지·시마즈 양군의 협공을 당하여 패전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筑紫広門(치쿠시 히로카도)의 시마즈 배반을 계기로, 시마즈군은 치쿠젠·히젠으로 병력을 진격시켜 히로카도를 굴복시켰고, 高橋紹運(다카하시 쇼운)의 岩屋城(이와야성), 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의 다치바나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쇼운은 할복했지만, 무네시게는 다치바나성에 농성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여기서, 시마즈씨는 치쿠젠 평정과 분고 토벌을 놓고, 후자를 우선시하여 오토모씨의 본거지 분고로 돌입하였다. 이미 오토모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토모 소우린의 아들 義統(요시무네)는 시마즈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부젠으로 도망쳤고, 분고는 시마즈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산슈를 통일하는데 51년을 소모하였던 시마즈씨는, 산슈 통일 후에 불과 10년만에 거의 규슈 대부분을 제패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4. 규슈 센고쿠 다이묘의 종말


1585년에 시코쿠 평정을 완료한 히데요시는, 시마즈씨에게 오토모씨와의 강화를 명령했다. 그러나, 시마즈씨는 이것을 거부하였고, 오토모씨를 공격했기 때문에, 마침내 히데요시는 시마즈 정벌군을 인솔하여 규슈에 출진하였다.


여기서 규슈의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느냐, 시마즈씨와 함께 싸우느냐하는 양자택일의 입장에 처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나베시마 나오시게를 시작으로 기타규슈 및 나카규슈의 다이묘들은 일제히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시마즈 공격군에 가담하였다. 결국 시마즈군은 완패하였고, 가고시마로 물러나 항복했다.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의해, 규슈는 도요토미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막번체제하에 들어가게 되어 규슈의 센고쿠 다이묘는 한꺼번에 근세 영주로 전환하여, 이른바 다이묘영국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의 낭인풍운록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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