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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슈지방 온천마을 유후인의 역사와 소개

태초 여행사 2010. 2. 15. 12:43

 

 

유후인 (湯布院)마을

유후인町(湯布院町)은 오이타(大分)현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동서로 8km, 남북으로 22km정도되며, 북동쪽으로는 豊後富士라고 불리우는 해발1584km의 아름다운 봉우리인 유후다케(由布岳)가 웅장하게 서 있고 북쪽방면으로는 유후다케에서 시작되는 넓은 츠카하라고원(塚原高原)이 펼쳐지고 남북으로는 오이타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휴양지이다. 츠카하라고원의 한쪽에는 피부병에 좋다고 소문이 나있는 츠카하라온천과, 분지로 이루어진 중앙부에는 넓게 펼쳐진 논밭과 위장병에 특효로 알려진 유히라(湯平)온천이 자리잡고 있다. 유히라온천은 別府온천, 奧飛 온천지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용출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후인(湯布院)의 옛이름은 유후고(柚富鄕)였다. 이것은 나무껍질로 목면을 만들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에도시대에 조세로서 거둬들이던 곡물창고가 건립되면서 유후인(柚富院)이라고 불리다가 1956년 인근마을 유히라(湯平)마을과 행정합병되면서 유후인(湯布院)으로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

1.댐계획반대운동(1952년)

보양온천지로서의 방향성이 정착되기까지는 약40년이 걸렸다. 그 이전에는 농업이 주산업인 작은 온천지였다. 1952년, 마을 중심부인 유후인분지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갑자기 대두되었다. 오이타강을 분지의 남단으로 모아서 거대한 댐을 만들고, 전력을 공급하고, 호반을 중심으로하는 리조트관광지로 하며, 댐으로 인하여 침전되는 토지소유자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전후 유후인은 그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않은 가난한 땅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마을집행부는 계획을 추진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활동하였고, 의회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마을은 두 파로 갈렸다. 반대입장의 선봉에는 마을의 청년들이 있 었다. 반대집회를 열고 강력한 반대행동을 나타냈다. 결국 댐건설은 다음해 물거품이 되었고, 이 일련의 운동은 마을조성운동의 기초가 되었고 주민이 마을의 중심이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955년 2월 由布院町과 湯平村이 합하여 湯布院町가 誕生되었다. 초대 町長선거에서 선발된 사람은 젊은 층인 36세의 청년의사, 마을의 청년회장이었고 댐건설반대운동을 리드하던 岩男씨였다.

2. 保養온천지 조성을 위한 노력(1955년대)

 岩男町長은 취임후
 「앞으로의 마을조성은 , 산업과 온천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다이나믹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과제이다. 」라는 소견을 발표하였다.
바로 가까이에는 큰 환락가로 일본에서는 온천지로서 대표격인 벳부시(別府市)가 있었다. 그 모습을 모방해도 큰 희망은 없어보였다. 유후인만이 가지고 있는 참다운 멋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돋보이게 하는 마을로 만들자는 생각이, 벳부시와는 다른 건전한 보양온천지조성이라는 방향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그리 쉽지않았다. 5년간의 노력 끝에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중심멤버였던 志手康二, 中谷健太郞, 溝口薰平 세 사람이 서독의 보양온천지를 시찰하고 돌아와 , 풍요로운 보양온천지조성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노력 끝에 큰 변화를 해 가게 되었다.

 1970년7月 야생식물의 보고라고 알려진 유후인에 골프장이 생긴다는 말이 있자, 자연을 지키기위하여 주민이 자주적으로 「由布院의 自然을 지키는 회」가 생겨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골프장건설을 저지하였다. 이 운동이 계기가 되어 「由布院의 장래를 생각하는 회」가 발족(1971年)이 되었다. 또한 경작의 기계화로 농경용소를 쓰지않게 되었고 들판이 황폐되어가자 소를 기르는 가정이 줄어들게 되었다. 황폐되어가는 들판에 개발의 손이 뻗치게 되자 들판을 살리기 위해 「소 한 마리 목장 운동」(1972년)이 일어나 도시사람들의 투자를 유치하여 농경용소가 아닌 육용소를 기르게 되었고 도시사람들에게는 이자대신 유후인특산물을 보내어 도시와 농촌이 교류하게 되었다.
 쿠아오루트란 독일어로서 보양지라는 의미이지만, 보양지를 더 확대한 개념이다.
유후인은 우선 여름철에 이벤트를 열어, 별이 무성한 산동네에서 연주가와 지역주민이 만나는 유후인음악제(ゆふいん音樂祭)(1975년)이 열렸다. 直下型地震에 의한 湯布院파괴설에 대한 소문을 무시해버리는 「역마차」(1975년)를 만들어냈다.
영화관이 없어서 「湯布院映畵祭」를 만들었다.

3.쿠아오르트구상의 부상(1975년)

 1969년 岩男町長은 국제회의차 유럽으로 건너가, 서독의 보양온천지를 시찰하였다. 그곳에는 그가 그리던 이상적인 보양온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것이 유후인마을의 쿠아오르트구상의 계기가 되었다.
1971년 6월 마을의 젊은 숙박업경영자인 志手와 中谷와 溝口 세사람이 유럽에 가서 40일간에 걸쳐서 견학했다. 커다란 자극을 받은 세 사람은 그 후 관광협회와 의회와 행정부에 마을조성추진을 위한 촉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1978년 5월 관광협회를 중심으로 쿠아오르트구상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고, 행정부와 관광협회와 의회를 중심으로 관민이 합동하여 서독시찰단 30명이 출국하였다. 단순한 관광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온천, 스포츠, 예술문화 , 자연환경을 모두 갖춘 생활환경을 정비하고, 주민의 생활을 보다 풍성하고 안락하게 하면서 유후인만의 독자적인 보양온천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1981년 환경부로부터 국민보양온천지로 지정되었다.
마을은 「가장 살기좋은 마을이야말로 우수한 관광지다」라고 생각하고, 풍부한 자연과 온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만족스럽고 안정된 생활이 유후인의 최대의 관광자원이라는 주민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주민과 행정이 일치된 협력시스템은 관민일체로 정착되고, 유후인은 지명도가 높은 마을로 떠올랐다.

이 아름다운 유후인을 돌아보자면 관광버스나 도보보다는 자전거나 역마차 아니면 클래식자동차(일명 스카보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유후인 역앞에서 실제로 자전거를 빌려주고 있는데 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고원은 자전거로 가기 힘드므로 역마차로 한가로이 감상하는 것도 좋다. 스카보로는 하루에 5편이 있는데 코스가 정해져 있다. 유후인역, 후로라 하우스, 홍선원, 우나구히메 신사, 민예촌 이 있다.


유후인만의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특주(텐치노시즈쿠, 유후노세이소, 타케다)가 있고, 토끼고기가 유명하다. 뽀코아뽀코라는 과자가 있고, 토라피스토라는 수도원에서 만들어내는 과자도 있다. 육식과 산채나물이 어울어진 음식을 맛볼수 있다. 온천 료칸에서 제공하는 일본 전통요리인 가이세키요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맛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일본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단, 가이세키요리를  석식과 조식으로 제공하는 료칸들은 1박에 1인당 2만엔 전후라 은근히 부담이 된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한번쯤 사치를 누리고 싶어도 좋을만한 요리임은 분명하다.

 

킨린호수, 츠카하라고원은 너무 아름답다.너무 개발에 치우친 이제까지의 우리나라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우리도 자연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며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 지켜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엇인가 우리 젊은이들은 쫓기고 있지는 않은가

 

 

출처:야후/인터넷자료와 개인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