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현상과 이해

태국시위- 잉락친나왓 총리 Vs. 수텝트악수반 전부총리의 이력과 배경

태초 여행사 2013. 12. 4. 16:46

 

 

 

 

 

                      태국시위- 잉락친나왓 총리 Vs. 수텝트악수반 전부총리의 이력과 배경

 

 

 

잉락 친나왓 총리

 

현 정부를 이끄는 잉락(46)은 권력남용과 탈세로 2년형을 선고받고 해외도피중인 탁신 전총리의 여동생이다. 44세라는 나이에

푸어타이당을 이끌고 2011년 3월 태국조기총선에서 500석중 과반이상인 264석을 확보해 아피싯이 이끄는 집권당인 민주당에

압승했다. 노인들이 많은 태국정치계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44세라는 나이로 신임총리로 확정된 잉락은 정치계에서는 초짜에

가깝다,

 

태국북부의 명문대학인 치앙마이대학 정치행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주립대학에서 정치학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정치와

관련된 이력의 전부이다. 대학원을 마친 뒤 부동산개발업체인 에스시에셋 경영에 나서는 등 정치권과는 한 발 떨어져 있었다.

잉락은 과거 탁신이 정권을 잡았을 때, 밀려드는 언론매체들의 인터뷰에서 정치에는 뜻이 없음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정치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잉락이 정계에 전격입문하게 된 데는 지난 2006년 쿠데타로 몰려난 탁신 전 총리의 바램과 관련이

있었다. 탁신은 해외도피중에서도 레드셔츠 세력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배신을 여러번 경험한 탁신에게

믿을만한 사람은 역시 가족이었다. 결국, 두바이에서 도피 중인 탁신은 자신을 대리인으로 막내 여동생인 잉락을 지목했다.
 


명문가 자제집안의 아피싯이 이끄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당시 철옹성과 같은 화려한 인맥으로 단단한 결속력을 보였고,군부, 재계,

정계,대부분이 집권당을 지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민주당과의 대결에서 정치계 신인인 잉락이 정권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으로 점쳤다. 그러나, 탁신 전 총리가 극빈층,서민층을 위해 내놓은 채무자 유예, 저렴한 의료보험 도입과 같은 파격적인 복지정책은

사상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들이었기 때문에 극빈층과 서민층은 탁신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방콕과 외곽지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극빈층,서민층, 노동자들, 그리고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는 북부, 북동부지역의 농민들은

선거운동내내 "오빠(탁신)를 좋아한다면 여동생인 나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했던 잉락을 선택했다. 부자당인 민주당은 군부와 재계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빈부격차가 심해, 민주당 정권에 대한 불신(不信)이 극에 달한 극빈층,서민층,농민들은 탁신의 대리인으로 불리우는 잉락이

이끄는 푸어타이당에 몰표를 던졌다. 사실상 잉락이 정권을 잡은 배경에는 이전, 조기총선을 이끈 레드셔츠세력들의 희생과 헌신적인 지지가

 있었다.2010년부터 2011년에 이르기까지 방콕을 중심으로 치앙마이, 북동부 이산지방은 레드셔츠세력들의 끈질긴 저항과 반정부활동이

있었다. 레드셔츠세력을 한데로 응집시킨 힘은 결국 탁신 전총리였다.이에 더하여 농촌 지역인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자란 잉락의 출신

배경과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역시 농민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잉락은 행정가로서, 정치가로서 경험이 전무한 여성으로, 정치적인 능력보다는 오빠의 후광을 얻어 당선된 만큼 집권기간내내 야당인

민주당으로부터 "탁신의 아바타""탁신의 대리인""탁신의 꼭두각시""탁신의 복제품" 이라는 비난을 한 시도 벗어난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잉락 현총리의 미모가 뛰어나기에 탁신의 미인계가 성공했다고 비아냥 거리는 말도 야권의 정치인들의 입에서 적지 않았다.

 

잉락이 오빠의 후광으로 정치계에 입문했기 때문에 집권하자마자 외신들은 엘로우 셔츠세력 또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언론계에서는 탁신의 후광으로 쉽게 정권을 잡은 잉락이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즉, 정국을 주도하고 싶으면 탁신과 다른 분명한 정치노선을 걸으라는 주문이었다. 잉락은 탁신의 대리인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2011년 사상유례없는 심각한 홍수를 극복하고, 태국경제를 다시 살리기위해 세금감면정책, 해외자본유치 정책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경제 회복을 이끌어냈다. 이제 잉락이 나약한 총리라고 말하는 여론은 많이 수그러졌다. 2012년 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잉락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라 부르며 높이 평가했다. 이 때 오바마의 연설은 선거없이 과도정권을 잡은 아피싯정권과 민주당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 되 셈이다.

잉락은 개인사는 철저하게 베일로 가려져있다. 부동산회사의 대표라는 것 외에 선거 전까진 외부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혼인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기업가인 아누손 아몬찻과 슬하에 아들 1명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X

 

 

ML

 

 

 

수텝트악수반 전 부총리

 

현 반정부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수텝 트악수반(64)은 전(前) 부총리로, 이번 시위를 주동하기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수텝은 방콕의

극빈층,서민층, 태국 북부와 북동부를 배경으로 하는 푸어타이당과는 반대로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태국 남부 수랏타니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한국인들에게 관광휴양지로 알려진 꼬사무이가 속한 수랏타니, 춤폰, 나컨시 탐마랏 지역은 고무농장,

 새우양식업, 야자유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수텝역시 야자유공장, 새우 양식업으로 크게 성공한 부자이다. 1979년 총선에서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민주당의 힘의 근원인 태국남부출신이라는 것, 부유한 지주집안 출신이라는 것, 성공한 기업가라는 배경은

그가 정치활동을 하는데 원동력이 되고 있다. 민주당의원들 대부분이 군부출신, 정치인 2세들, 아니면 그와같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수텝은 농림부 차관, 통신부장관, 아피싯정권의 부총리까지 역임했다. 1979년 정치계 입문후 소용돌이치는

태국정치계에서 비교적 순탄하게 부총리까지 오르게된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위기관리가 있었다. 그의 첫번째 위기는 1995년 토지개혁

  스캔들이었다. 토지개혁의 일환으로 수랏타니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배당된 토지권을 남부 푸켓의 돈많은 지주들에게 빼돌린 것이 발각이

되어 정치권, 언론으로 부터 공분을 샀다 당시 정치인들의 토지개혁 스캔들로 인해 극빈자,서민,농민들은 비리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 반면, 탁신 전 총리는 빈곤 해소를 위한 정책들을 연이어 내놓음으로 농촌 빈농과 저소득 노동자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수텝은 탁신과 철저하게 반대의 길을 걷기시작한다. .

 

 

 


탁신지지파의 절대다수인 빈농과 노동자들, 빈빈층, 서민층은 탁신이 탈세, 권력남용등으로 2년 실형을 선고받은 데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태국 정치인들중 어느 누구도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이다. 사실상, 태국 정치인들중

상당수는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화려한 전력들을 가지고 있고, 축첩을 하는등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치인을 찾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정도로 태국 정치계는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있다. 정치인들 대다수가 자신들의 권력을 기반으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데 반해서 탁신은 비록 탈세를 했지만 그나마 서민,극빈자,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많은 정책을 내놓았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수텝은 "위기관리의 달인" "노련한 늙은 여우"로 불리운다. 탁신이 기업가로서 주식거래 비리에 연루되었을 때, 탁신을 ‘비리 정치인’이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했지만, 수텝자신 역시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민주당정권시절인 2009년 정부가 불하한 미디어 그룹 주식을 불법적으로

보유한 장본인으로 언론으로 부터 비난을 받았다. 수텝은 차관,장관, 부총리등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비리들이 있었지만 정치적 고비에

 직면할 때마다 탁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자신의 정치적 성공으로 바꿔놓는 지략이 있었다.

 

2008년, 노란셔츠 세력으로 표현되는 반탁신파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와 군부의 쿠데타로 탁신계 정권이 전복되자, 민주주의 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선거 없이 꾸려진 과도정부에 아피싯 웨차치를 총리로, 자신은 부총리로 입각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셔츠

시위대들에게 발포를 허가해 92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잉락이 총리로 당선되자 살인 혐의로 기소되는 등 위기에 몰렸지만, 잉락 2013년

8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사범들을 사면해 정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를 가진 사면법으로 인해

수혜자가 된 것도 잠시, 곧바로 시위대를 이끌면서 정치권의 "핵(核)"으로 부상했다. 그에 더하여,. 부유한 명문가집안 출신으로 총선없이

정권을 잡아 연약한 이미지를 가진 전총리 아피싯과는 달리 . 극렬한 시위로 연일 신문방송에 노출되어 야권에는 지도력을 가진 "능력있는 정치인"

으로 평가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텝을 기득권 세력의 수장으로 받아들이는데는 한계가 있다. 태국정치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은 현 시위대는 대부분 "생각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로 이들은 단지 하루일당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들을 동원하기위해 하루일당 300~1.000밧을 주려면 현재의 시위대 규모로

 보건대 1일 500~600만 밧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돈 2억에 가까운 돈인데 그의 재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더하여 수텝이

정치계 입문부터 현재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일처리에 헛점이 많고, 다혈질적인 성격이기에 현재의 시위를 이끌어낼만한 능력있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행동대장에 불과한 "용감한" 사람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태국정치에 정통한 사람들은 현재의 태국시위는

탁신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수장인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과연, 탁신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잉락 현 총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